터툴리안은 160년경 카르타고(지금의 튀니지)에서 로마인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그는 수사학과 법률을 공부하고 법률가가 되었다.
터툴리안은 40세에 그리스도를 만났다. 당시 로마사회에는 부도덕한 삶이 만연해 터툴리안은 매우 금욕적이었으며, 육신을 절제하는 삶을 강조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기독교 신앙을 위한 변증가로서 광범위한 저작 활동에 몰두했다. 그는 철학, 법률, 헬라문학, 라틴 학문에 심오한 지식을 소유하고 있었다. 번뜩이는 지성, 꺾이지 않는 의지, 불같은 웅변, 날카로운 풍자 등 풍부한 은사를 가지고 진리 수호에 총력을 기울였던 터툴리안은 탁월한 변호사, 논리적인웅변가, 철의 의지를 지닌 변증가로 평가된다. 그의 방대한 저술들 중 가장 유력한 저서는 『변증Apology』이다. 이 책에서 그는 다른 그리스도인 변증가들이 한 번도 다룬 적이 없는 강력한 논점들을 다루었다.
터툴리안은 신학적 저술들을 라틴어로 저술했고, 라틴역 성경도 마련하여 라틴 신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터툴리안은 2~3세기의 가장 뛰어난 기독교 저술가의 한 사람으로 평가되는데, 이교도들도 그의 문체에 매료되어 그의 작품을 읽을 정도였다. 그는 법률학적인 용어나 수사학적으로 세련미가 넘치는 용어들을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그는 ‘기독교인들을 색출해낼 필요는 없어도 당국에 고발된 기독교인들을 처벌하라’ 는 트라얀 황제의 불의한 판결에 항거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그를 ‘결코 사과하지 않는 변증가’로 평가했다.
5세기의 한 저술가는 “그가 언급하는 모든 말은 경구(驚句)였고, 그가 진술한 모든 내용들은 승리를 거두었다.”고 말했다. 그는 대적자들을 완전히 패배시킬때까지 논증했지만, 앙심을 품거나 부정직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자기 주장의 정당함을 확신하고 최선을 다해 자신의 주장을 변증했다.
지리상으로 알렉산드리아가 헬라 기독교의 중심지였다면, 카르타고는 라틴 기독교의 중심지였다. 이 시대라틴 신학자의 중심 인물은 터툴리안과 키프리안이었다.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감독들은 대개 헬라 철학에 정통한 사람들임에 비해 라틴 교회의 감독들은 대개 법률, 정치 등의 사회과학적인 교양을 갖춘 사람들이었다. 그리하여 알렉산드리아 신학은 기독교가 지니고 있는 영적 진리의 특성을 잘 설명한 데 비해, 라틴 신학은 기독교의 역사성을 분명히 해주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즉, ‘역사적 사건과 그것의 근거가 되는 성경의 계시, 그리고 그 계시에서 나온 교회를 통해 기독교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우쳐주는 데 기여했다.
터툴리안은 진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은 발견할 때까지 찾아야 한다. 그러나 일단 발견했으면 믿어야 한다. 그 이후에 여러분이 해야 할일은 여러분이 이미 믿고 있는 것을 붙드는 일이다. 뿐만 아니라 여러분은 더 이상 믿을 것이 없음을 믿어야 하고, 더 이상 찾을 것이 없음을 믿어야 한다.”
터툴리안은 모든 사변(思辨)을 배척했다. 그리고 성경 밖의 문헌에 근거한 신학 추구를 거부했다. 그는 이교 철학이 모든 이단들의 원천이라 하였다.
단호하며 열정적인 그는 처음에는 주류인 정통교회를 지지하다가 207년에 몬타누스주의(주로 세상의 임박한 종말과 거기에 입각하여 더욱 엄격한 생활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재혼도 금하고 금식을 많이 하며 박해 시에 숨는 일도 금했다)에 가담했다. 법률가적인 그의 성향은 엄격한 질서를 그리워했고, 당시 교회는 터툴리안의 기준에 미달이었기 때문에 몬타니즘과 상통하는 면이 있었다. 그러나 말년에는 몬타니즘에 환멸을 느끼고 거기서 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탁월한 재능으로 인해 교회의 존경과 신뢰를 계속 받았다. 그는 220년 이후 연로하여 죽었다.
터툴리안의 『변증』
그의 저술 중 가장 유명한 책은 단지 『변증Apology』이라 불린다. 터툴리안의 저술들은 저스틴과 같은 2세기변증가들의 저술들을 계승한 것이었으나, 그들의 저술보다 훨씬 뛰어난 면을 지니고 있다. 그는 단지 그리스도인이란 이유 때문에 사형을 선고하는 불법에 대하여 그의 모든 해박한 법률 지식을 동원하여 논박했다.
“우리는 단지 어제만을 제외하고는 당신(황제)의 모든 곳들-도시들, 섬들, 요새들, 마을들, 시장들, 군대의 막사들, 궁전, 원로원, 공회 등-에서 우리의 의무를 수행했다. 그러나 우리는 당신의 신전은 멀리했다.” 『변증』 37장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국가의 모든 재난의 원인이며 모든 사람이 겪는 고통의 원인이라는 근거 없는 모함으로 그들의 증오를 정당화한다. 만일 티베르 강이 도시의 성벽에 넘쳐 흐르거나 혹은 나일 강이 주위 평야를 적시지 않거나, 만일 천체에 이상현상이 나타나든지 혹은 땅이 움직이든지, 기근이 있든지 혹은 전염병이 있다면 곧바로 다음과 같이 소리친다.
‘그리스도인들을 사자에게 던져라.’
무슨 소린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한 마리의 사자에게 던지란 말인가?” 『변증』 40장
“(우리에 대한) 당신들의 박대가 아무리 교묘할지라도 그것은 당신들에게 유익을 주지 못한다. 대신에, 그것은 우리 종파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당신들이 우리를 쓰러뜨릴 때마다 우리의 수는 더 늘어난다. 그리스도인들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다. 당신들이 비난하는 그 내용이 우리에게는 도움이 된다. 왜냐하면 우리의 신앙 내용을 알고자 하는 사람이 그 비난의 이면에 숨어 있는 것을 연구하고 감동을 받지 않겠는가? 이렇게 연구한 그 사람이 우리의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겠는가?” 『변증』 50장
터툴리안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중시했다. 그리스도의 가장 중요한 사명과 활동은 십자가에서의 죽음이라고 했다. 그는 이레니우스와 함께 영지주의를 강력히 반대했다. 그는 또 오리겐과는 달리 그리스 철학을 증오하고 강력히 비판했다. 그는 그리스 철학을 이단의 근원으로 보았다.
터툴리안은 그의 생애를 자신의 신앙의 일관성과 반대자들의 모순을 보여 주는 데에 쏟았다. 그는 진실하고 선하고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위해서는 목숨까지도 바칠 단호한 인물이었다. 한편으로 그의 성격은 다소 모나고 거칠고 괴팍했다고 전해진다. 상대방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경우도 있었고, 사실을 과장하거나 기독교인들의 도덕성을 과장하는 경우도 혹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터툴리안의 신학은 정통으로 인정받고 있고, 그의 탁월한 논리적 사고는 기독교를 변증하는 데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그는 ‘신약(新約)’이라는 말과 ‘삼위일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하나의 본질과 세 位格(위격)’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특별히 터툴리안의 삼위일체 개념은 후에 있을 니케아 종교회의에 큰 영향을 준다. 그는 또 어린아이에게 주는 유아 세례를 반대했다.
디오그네투스 선생에게 보낸 편지
작자 미상의 저자가 2세기 말엽과 3세기 초엽 사이에 집필한 변증론 『디오그네투스(Diognetus)에게 보낸서한(Epistola ad Diognetum)』이라는 문헌이 있다.
이 문헌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앙리 에티엔느(Henri Etienne)가 1592년 파리에서 『디오그네투스에게 보낸 서한』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판하면서이다. 이 문헌의 사본이 처음 발견된 것은 15세기 초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어느 생선가게의 헌 종이 꾸러미 안에서였다. 희랍어를 공부하러 온 젊은 학생이 이것을 헐값에 산 뒤 한 신학자의 손으로 넘어가면서 서방 교회에 이 문헌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 후 스트라스부르크 시립도서관에 사본이 보관되어 있다가 1870년 전쟁 때 소실되고 말았지만, 이미 여러 번 연구되고 출판된 뒤였다.
이 문헌은 호교론(護敎論)이면서 동시에 그리스도교 신앙을 권유하는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다. 곧 디오
그네투스가 던진 그리스도교에 관한 질문에 대답하는 편지 양식이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이 “그리스도 신앙에 관한 한, 신약성경을 제외하고 이 책만큼 현대인의 마음에 감동을 주는 저술은 없다”라고 평가할 만큼 뛰어난 작품이다. 일부 학자들은 저자를 유스티누스로 보기도 한다. 그 안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다.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똑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남과 다르다면 영토가 달라서도 아니고 하는 말이 달라서도 아니고 의복을 입는 모양이 달라서도 아닙니다. 그들은 자기네 고유한 도성에 고립되어 사는 것도 아니고 특이한 언어를 쓰는 것도 아니며 특별한 모양으로 삶을 사는 것도 아닙니다. 그들의 교리는 인간들의 불안한 지성이 탐구하여 달성해낸 것도 아니고, 어떤 사람들이 하듯이 인간적인 철학 체계를 신앙으로 고백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각자의 운명이 정해주는대로 그리스 도시들이나 야만인 도시에 거주하며, 의복이나 음식이나 그 밖의 생활방식에 있어서 지역의 전통에 그대로 순응하고 있습니다. 사회생활을 영위하는 방식에서는 놀라운 모범을 보여주며, 그 모범은 누구나 자백하듯이, 믿기지 않을 정도입니다.”
“그들은 지상에 거처하지만 마치 이방인 같습니다. 시민으로서 모든 본분에 참여하지만 그들은 외국인 취급을 받습니다. 어느 이역(異域) 땅이나 그들에게는 조국이요, 어느 조국도 그들에게는 이역 땅입니다. 누구나 하듯이 그들은 혼인을 하고 자녀를 낳지만 갓난아기를 내다 버리지는 않습니다. 누구와도 밥상을 함께 나누지만 잠자리를 함께 하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육을 입고 살지만 육에 따라 살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지상에서 삶을 이루고 가지만 천국의 시민들입니다.
그들은 정해진 법률에 복종하지만 그들의 생활 모습은 법을 초월합니다. 모든 이를 사랑하면서도 모든 사람들에게서 핍박을 받습니다. 혐의가 없으면서도 유죄로 판결을 받습니다. 사람들이 그들에게 죽음을 부여하지만 그들은 거기서 생명을 얻습니다. 처형을 당할지라도 다시 살 것을 생각하고서 기뻐합니다. 그들은 가난하지만 실은 부유합니다. 모든 것을 빼앗기지만 그들은 충만해 있습니다. 그들은 경멸을 받지만 멸시 중에도 하나님 앞에서는 오히려 영광을 받습니다. 그들의 영예는 사정없이 짓밟히지만 그것이 그들의 무죄함을 증명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모욕을 당하면서 상대방을 축복합니다. 온갖 무례를 가하지만 그들은 존경으로 대합니다. 선을 행하고서 악인으로 벌을 받습니다. 그런데 벌을 받고서도 그것이 자기들에게 생명을 주는 양 즐거워합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을 이단자들이라고 공격하고 헬라인들은 그들을 박해합니다. 하지만 그들을 미워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미워하는 이유를 밝히지 못합니다.”
“영혼은 불멸이면서도 죽어야 할 운명의 육체 안에 예치되어 있는 것같이 그리스도인들도 역시 비록 타락하기 쉬운 세상사 가운데서 이방인으로서 살아가지만 그들은 하늘에서 그들을 기다리는 거룩함을 바라보며 고대하고 있습니다. …
우리 불의가 극에 다다라 그 책벌의 형태로써 고초와 죽음이 임박해 우리를 위협하고 있는 것이 환히 나타났을 때, 미리 작정하신 자비와 권능을(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은 참으로 위대합니다)
보여주실 때가 되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미워하거나 거부하거나 복수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인내로 우리를 참으시며, 자비하심이 넘쳐 우리 죄를 짊어지고 자원하여 그 죄를 속량할 대가로 당신의 아들을 주셨습니다. 악인을 위해 거룩하신 분을, 죄인을 위해 무죄하신 분을, 불의한 자를 위해 의로우신 분을, 썩어버릴 자를 위해 썩지 않으시는 분을, 그리고 죽어야 하는 자를 위해 불멸이신 분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아니라면 우리 죄를 덮어버릴 수 있었겠습니까? 하나님의 독생자 안에서가 아니라면 악하고 불의한 우리가 어떻게 의(義)를 발견할 수 있었겠습니까?
오, 복된 전환이여! 오,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업적이여! 오, 기대치 못할 은혜여! 많은 이들의 불의가 한 의인 안에서 덮여져, 한의인의 정의는 수많은 불의한 이들을 거룩하게 했습니다.”
그 외의 변증가들 콰드라투스(Quadratus) 아테네의 감독으로서 기독교 최초의 변증가이다. 변증가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지는 그는 125년경 로마의 하드리안 황제에게 공개적인 변증서신을 보냈다. 그는 예수께 병 고침을 받은 자들 중 지금까지 살아 있는 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들어 기독교를 힘있게 변증하였다.
아테나고라스(Athenagoras) 2세기 후반의 인물로서 아테네에서 출생하여 철학자로 활동하다가 후에 기독교를 믿었다. 177년경에 쓴 그의 저서 『기독교에 관한 사명』과 주님의 부활을 적극적으로 변호한 『부활』이 유명하다. 그는 변증가 중 뛰어난 문장력을 갖춘 강력한 변증론자였다.
멜리토(Melito) 사데 교회의 감독이었던 멜리토는 신중하고 위엄 있는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의 가정이 찢기고, 그리스도인들이 체포와 고문을 당하며, 맹수나 도끼에 의해 잔인하게 죽임을 당하고 화형에 처해지는 모습을 보며 황제 앞에 변호사로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