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해 사본의 가치와 중요성
지금까지 발견된 성경 사본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쿰란에서 발견된 ‘사해 사본’이다. 사해 사본은 BC 2세기~BC 1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사해 사본의 중요성은 발견된 후 오늘날까지 높이 평가되고 있다. 사해 사본이 발견되기 전, 남아 있는 히브리어 구약 성경의 사본들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AD 10세기에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래서 AD 10세기에 필사된 이 사본들이 예수님 당시에 사용되었던 성경과 같은 것이라고 증명하기 어려웠었다. 그런데 사해 사본이 발견됨으로써 우리가 보고 있는 구약 성경이 예수님 당시의 성경과 같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게 되었다.
사해 사본은 말라기가 기록되고 불과 300여 년밖에 지나지 않은 때에 필사된 것이다. ‘마소라 사본은 말라기 기록 후 1300여 년이나 지나서 필사되었다’며 그 정확성에 의문을 제기하던 사람들에게 사해 사본의 발견은 그 공백기를 1000여 년이나 줄여놓은 것이다.
사해 사본과 1000여 년 후에 만들어진 마소라 사본, 이 두 사본이 얼마나 비슷한지 비교해본 결과 놀랍게도 완전히 일치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마소라 사본은 사해 사본과 똑같은 성경이고, 그 이전 성경의 원본과도 똑같을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사해 사본으로 인하여 지금 우리가 보는 성경과 예수님께서 지상에서 사용하시던 성경이 동일하다는 증거를 확보하게 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은 모세와 여러 선지자들이 기록한 그 성경과 똑같은 성경인 것이다.
서기관들이 엄격한 규칙을 좇아 신중에 신중을 기해 필사했기 때문에 사해 사본이나 마소라 사본의 내용이 똑같이 유지되었던 것이다. 유대인들은 목숨을 걸고 구약 성경을 지켜왔고, 신약 시대에도 왈도파(派)나 틴데일 등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성경을 전해주기 위해 많은 고난과 희생을 감내했다.
얌니아 회의와 구약의 정경(正經) 확정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 사람들이 급속히 늘어나자 유대인들은 위협을 느끼고 그리스도인들을 배척하게 된다. 그 중심에 유대교 최고의 랍비였던 요하난 벤 자카이(Yohanan Ben Zakai)가 있었다.
요하난 벤 자카이는 바리새파의 대제사장으로, AD 66~70년 열심당원이 주도한 유대의 반란이 결국 실패할 것을 예견하고 유대교의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당시 로마 진압군 사령관이었던 베스파시안 장군을 만나 최소한의 유대교 랍비의 존속을 허락 받는다. 그 후 AD 70년에 티투스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이 완전히 파괴되고, 유대의 율법학자들은 예루살렘에서 비교적 가까운 지중해 연안의 도시 얌니아로 대거 이주한다. 얌니아에 모인 율법학자들은 그곳에 율법 학교를 세우는 것과 종교 생활에 대한 보장을 로마 당국으로부터 허락 받는다. 그래서 예루살렘이 완전히 파괴된 후 얌니아는 많은 유대교 율법학자들이 활동하는 도시가 되었다.
요하난 벤 자카이는 AD 90년경에 랍비들을 불러 모아, 얌니아 지방에 있던 ‘예쉬바(Yeshiva)’라고 불리는 유대인 랍비들의 아카데미에서 구약 성경의 정경(正經)을 결정하는 문제를 논의한다. 이 회의에서 율법학자들은 유대교의 경전 목록, 즉 구약 성경의 정경을 확정한다. 이때 70인역 성경에 포함되어 있었던 일부 책들은 제외되었다. 그런데 얌니아 회의는 정경 목록을 새롭게 확정한 것이 아니라, BC 400년경에 (일설에 의하면 에스라에 의해) 일차적으로 확정된 목록을 그대로 재확인한 것이었다.
그 후 개신교에서는 히브리어 경전 24권을 70인역을 따라서 39권으로 나누었다. 천주교에서는 382년 로마 주교 회의에서 헬라어 70인역의 구약 성서 46권을 정경으로 인정했고, 이것을 트리엔트 공의회(1546년)에서 다시 확인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신약 정경화의 필요성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구약 성경에 대한 신뢰감이 매우 두터웠기 때문에 또 다른 성경이 있어야 된다는 생각을 가지지 않았다. 당시에는 예수님을 직접 목도(目睹)하고 주님의 말씀을 직접 들은 신자들도 많았고, 적어도 그 목격자들의 생생한 보고와 증언을 들으면서 성도들이 그 증거를 믿고 따라서 살았으므로 주님과 주님의 사역에 대한 어떤 기록의 필요성을 그다지 느끼지 않았다. 그리고 사도들이 교회를 인도했을 때에는 예수님의 재림이 머지 않았다는 기대가 강했기 때문에 신약 정경이 곧 만들어지지 않았다. 임박한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동안은 보존을 목적으로 하는 문서화 작업의 필요성을 별로 느끼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AD 1세기가 지나면서 사도 시대가 끝나자 수많은 외경(外經)과 위경(僞經), 이단들의 책, 저자를 알 수 없는 내용이 변질되고 조작된 책들이 난무하게 되었다. 정경(正經)으로 인정받으려는 거짓 경전들의 출현은 교회로 하여금 신약 성경의 정경화 작업에 착수하게 하였다. 또한 후일에 ‘교회의 모든 문서를 불사르라’는 로마의 박해자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칙령도 정경의 확립을 재촉했다.
신약 성경은 9명 가량의 기자들이 반세기에 걸쳐서 기록한 것으로, 내용별로는 복음서, 사도행전, 서신서, 예언서로 나눌 수 있다. 신약 성경은 기자의 편지가 수신자인 교회나 개인에게 전달되었고, 이것이 초대교회에서 회람으로 각 지(枝)교회에서 읽혀지다가 (골 4:16), 후에 그 사본들이 집성되면서 한 권의 책으로 묶여졌다.
현재 신약 성경의 사본으로, 부분적으로나 혹은 전체적으로 발견된 헬라어 사본은 모두 합하여 무려 5000개가 넘는다고 한다. 이 수많은 성경 사본들을 연구 조사하고 서로 비교하여 원본에 보다 가까운 성경을 찾으려는 노력이 오랫동안 계속되고 있는데, 이러한 일련의 작업을 본문비평(Textual Criticism)이라고 한다.
신약의 정경화 과정
성경학자들은 신약 성경 27권 중 초대교회 때부터 승인을 받아온 20권을 ‘원경’이라고 부르고 나머지 7권은 ‘대경’이라고 부르는데, 대경은 몇몇 교회 지도자들에 의해 약간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 후 4세기에 이르기까지 개개의 책들에 대해 속사도나 여러 교회의 지도자들이 그 권위와 가치를 인정하면서 마침내 정경으로 받아들여졌다.
많은 문서들 가운데 어떤 것은 정경으로 채택되고, 어떤 것은 채택되지 않았을까? 어째서 어떤 문서들은 마침내 완전히 신약 성서에 들어갈 수 있었을까? 그것은 그 책이 교회의 공중 예배에서 읽혀졌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신약 정경 27권의 목록은 동방의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감독으로 있었던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296~373)에 의해 처음으로 마련되었다. 아타나시우스는 AD 367년에 자기 교구(敎區)의 여러 교회에 부활절 서신을 보내면서 오늘의 신약 성경 27권과 동일한 목록을 제시하였다.
정경 확립의 중요성을 깨달은 동서 교회는 AD 363년 라오디게아 종교 회의, AD 393년 히포 종교 회의 등 주요한 종교 회의를 거쳐 마침내 AD 397년에 어거스틴의 주도 하에 열린 제3차 카르타고 교회 회의에서 정경에 대한 최초의 결정을 내렸다. 이 회의에서 규정된 사항 가운데 하나는 교회 내에서는 오로지 정경으로 인정된 책만 읽혀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때 결정된 정경 목록은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27권의 목록이 되었다. 히브리서는 바울의 서신이라는 이유로 인정되었다. 이후 열린 히포 교회 회의(419년)는 제3차 카르타고 교회 회의의 목록을 거듭 확인하였다. 신약의 정경화는 다소 시간과 과정을 거쳤지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길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신약 정경 확정의 기준
신약의 정경화에는 일정한 기준이 적용되었다.
첫째는, 신구약 성경을 막론하고 ‘신적 권위가 있는가?’였다. 이는 구약의 선지서들이 인정받은 방법으로, 기록된 말씀이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와 같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왔다는 내적인 증거를 가지고 있는가라는 것이었다.
둘째는, 사도성이었다. 사도들이 기록한 것이냐는 것이다. 사도들의 권위는 예수님에 의해 공인된 권위이므로 이 기준은 정당하다.
셋째는, ‘내용의 주제나 그 주제의 영적인 특징이 성경으로서 합당한가?’였다. 이러한 기준에 의해 거짓문서들은 제거되었다.
넷째는, 보편성이었다. ‘교회가 전반적으로 그 문서를 받아들이고 있느냐?’는 것이었다.
다섯째는, 영감성이었다. ‘그 문서가 “하나님의 감동으로”(딤후 3:16)라는 명백한 증거를 가지고 있는 가?’라는 것이었다.
여섯째는, 전통성이었다. 어떤 저작이 고대로부터 전통적으로 사용해왔는지의 여부다.
마지막으로 제일 중요한 요소는, ‘그리스도 중심적인가?’라는 것이었다.
외경(外經)과 위경(僞經)
외경을 가리키는 ‘아포크뤼파(apocrypha)’는 ‘숨겨진’이란 뜻이다. 구약의 외경은 날조된 듯한 역사와 비도덕적인 내용, 그리고 출처불명의 전설과 환상적인 내용을 포함하고 있어서 저급한 것으로 여겨지면서도 항상 성경 주위를 맴돌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져 왔고, 초대 교회 감독들 중에도 외경을 인용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감독들 가운데 이레니우스 같은 이는 외경을 정경처럼 취급하지 말아야 할 것을 주장했고 , 제롬은 자신의 벌게이트 라틴역에서 가장 확실하게 외경을 정경과 분리해야 할 것을 주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거스틴은 외경을 정경과 같이 취급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으며, 이는 중세 카톨릭 교회가 외경을 정경으로 삼는 데 많은 영향을 끼쳤다.
현재까지 발견된, 구약 정경의 목록이 언급된 문서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AD 170년경 사데교회의 감독이었던 멜리토가 만든 것이다. 그 안에는 구약 성경을 에스더만 제외하고 모두 열거하고 있는데, 외경은 하나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
쿰란의 사해 문서에서도 분명히 외경은 정경으로 간주되지 않았다. 카톨릭은 ‘70인역’에 외경이 포함되어 있다고 주장하는데, 현재 있는 70인역은 후대의 복사본(AD 325년)이며, 원래의 사본에 외경이 포함되었다는 증거는 없다. 유대인들조차 외경은 인정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사해 사본 등을 비롯한 다른 증거들은 구약 성경에 외경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음을 말해주고 있다.
로마카톨릭의 신약 성서는 개신교와 마찬가지로 27권이지만, 구약 성서는 후대의 ‘70인역에’ 들어 있는 외경들을 포함시켜서 현재 카톨릭의 구약 성경은 46권으로 되어 있다. 카톨릭이 외경을 공식적으로 성경에 포함시킨 것은 1546년에 있었던 트랜트 공의회 때이다. 트랜트 공의회는 1545년부터 1563년까지 모두 25회에 걸쳐 열린 카톨릭교회 회의였는데,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의 문제들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기 위한 회의였다. 이 회의에서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종교개혁자들의 견해에 대항하기 위해서, 죽은 자들을 위한 기도나 연옥의 정당성, 또 행위에 의하여 의롭게 된다는 근거를 갖기 위하여 고의적으로 외경을 정경에 포함시킨 것이다.
루터는 그의 독일어 성경에서 외경을 제외시켰으며, 이후의 번역 성경들은 거의가 외경을 제외시켰다. 개신교 정경은 외경을 제외한 히브리 성서 24권을 구약 정경으로 채택하되, 그 순서만큼은 70인역의 배열 방식을 그대로 따랐다. 그 이유는 히브리 성경의 마지막 책인 ‘역대’보다 70인역의 마지막 책인 ‘말라기’가 마태복음으로 시작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훨씬 더 자연스럽게 이어지기 때문이었다.
신약의 외경은 2세기에서 8~9세기의 기간에 쓰여진 것들이다.
위경(pseudepigrapha)이란 헬라어로 ‘거짓된 책’이라는 뜻이다. 위경은 외경과 마찬가지로 BC 200년에서 AD 200년 사이에 쓰여진 것들이 대부분이며, 그 내용은 완전 허구다. 위조 문서와 거짓 문서, 이단적인 교리가 기록된 문서들로, 초대교회의 감독들은 일찍부터 이것들을 정경에서 제외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