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부 아프리카는 가나-토고-베냉-나이지리아 식으로 나라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가나에 자주 가는데, 그리 멀지 않아서 육로로 다니곤 한다. 베냉에서 육로로 가나에 가려면 반드시 토고를 통과해야 한다. 먼저 토고로 가는 차를 타고, 토고에서 다시 차를 갈아타고 가나로 가는 것이다.
베냉에 간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이다. 한번은 우리 부부가 토고로 가는 택시를 탔는데, 택시에는 운전사 옆자리에 이미 한 사람이 타고 있었다. 택시는 조금 가다가 멈추더니 또 한 사람을 뒷자리에 태웠다. 뒷자리가 꽉 찼다. 택시는 조금 가다가 또 멈추었다. 이번에는 손님이 운전사 옆자리로 타려고 했다. 그러자 운전사 옆에 탔던 손님이 변속기가 있는 쪽으로 바싹 다가가더니 등을 운전사 쪽으로 향했다. 운전사 옆에 있는 한 자리에 두 사람이 탄 것이다. 먼저 탄 사람은 많이 불편해 보였고 나중에 탄 사람이 오히려 편해 보였다. 이제 운전사를 포함해서 모두 여섯 명이 차를 타고 가는 것이다. 그런데 조금 가다가 한 사람이 손을 들자 차가 또 멈추었다.
‘어! 자리가 다 찼는데 어떻게 저 사람을 태우지?’
택시에 타려고 하는 손님은 아주 뚱뚱한 여자였다. 그 사람은 뒷자리에 타려고 했지만 빈 공간이 없어서 탈 수가 없었다. 그러자 운전사가 내리더니 그 여자 분을 밀기 시작했다. 가까스로 발이 택시 안으로 들어가자 운전사는 문으로 손님을 택시 안으로 밀어넣으면서 ‘쾅’ 닫고는 자기 자리로 가더니 운전을 시작했다. 택시에는 이제 일곱 명이 탄 것이다.
나는 불평하기 시작했다. ‘이런 상태로 어떻게 토고까지 가지? 날씨는 덥고, 불편하고…. 앞으로 서너 시간을 어떻게 가냐!’
속으로 한참 불평하고 있는데, 운전사 옆에 바싹 앉아서 등을 운전사 쪽으로 향하고 있던, 첫 번째로 탄 손님이 그 불편한 상태에서 쿨쿨 자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하나님이 나에게 책망하시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너, 베냉에 왔어! 한국에서 살려면 한국 기준을 따라서 살아야 하지만, 베냉에서는 차를 이렇게 타고 다니는 것이 이상하지 않아. 저 사람을 봐! 불편한 것으로 따진다면 저 사람이 너보다 더 불편해. 그런데 네가 아프리카에서 살면서 한국 기준으로 살려고 하니까 이렇게 불평하고 있잖아. 한국 기준으로 살려면 여기서 살지 말고 한국으로 돌아가.’
하나님이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그 말씀을 듣고 내 기준을 내려놓자 갑자기 마음이 편해지기 시작했다. 불편한 형편이 문제가 아니라 내 기준이 있으니까 불편했던 것이다.
‘아! 하나님, 베냉에서는 베냉 기준으로 살아야 하네요.’
그 후로는 일곱 명이 택시를 타는 것도 아주 당연한 일이 되었다.
우리가 하나님의 축복을 바라고 하나님의 역사를 바라지만, 우리 기준은 버리지 않고 살려고 한다. 그러나 아프리카에서 살려면 한국 기준을 버리고 아프리카의 기준을 가지고 살아야 하듯이, 하나님의 세계에서 살려면 내 기준을 버리고 하나님의 기준으로 살아야 한다. 그럴 때 우리가 복된 삶을 누릴 수 있는 것을 본다.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잠 16:25)
나의 옳은 기준으로 살아가면 좋은 것 같지만, 그 길은 필경은 사망의 길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