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교회, 새로운 예배
루터는 영혼의 구원 문제로 고통하며 시편과 로마서를 연구하던 중에 ‘하나님의 의’가 무엇을 뜻하는지 발견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라는 종교개혁의 원리를 세웠다. 여기에 기초하여 카톨릭교회의 사상·제도·교리에 대해 개혁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카톨릭교회에서 가르치던 인간의 공로 사상을 루터는 복음과 하나님의 은혜로써 여지없이 깨뜨렸다. 그는 영적인 부분과 죄 사함에 대해 특권을 가졌다고 주장하는 교황권의 횡포에서 사람들의 영혼을 해방시켰으며, 구원의 길과 본질을 명백히 밝혔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무엇보다 예배 의식儀式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성직자 중심의 예배에서 예배자 모두가 참여하는 예배로, 의전儀典 중심의 예배에서 말씀 중심의 예배로 변했다. 중세 카톨릭교회의 예배는 성직자 외에는 알아듣지 못하는 라틴어로 진행되어 회중은 방관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교회에서 성경은 성직자만 읽을 수 있었고, 성만찬에서 일반 신도는 떡만 받고 포도주 잔은 받을 수 없었다. 루터는 이러한 잘못된 관행에 종지부를 찍었다. 예배를 모든 사람이 알아듣게 독일어로 진행해 오랫동안 막혀 있던 예배자들의 귀를 열어 주었다. 성만찬에서도 모든 예배자가 떡과 잔을 받았다. 루터는 또한 찬송가를 직접 작사, 작곡하여 모든 예배자가 한목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게 했다. 예배자 모두 참여자가 되어 예배는 활기가 넘쳤고, 교회에는 신선한 새 바람이 불었다.
루터는 하나님의 말씀 선포를 예배의 중심에 놓았다. 그는 “하나님 말씀은 생명력 있는 살아 있는 말씀이요, 설교를 통해서 선포된다”고 하였다. 위대한 설교가였던 루터는 비텐베르크 교회 강단에서 평생 2,000차례 이상 정기적으로 설교했다. 그리고 ‘모든 성도가 제사장’이라고 주장했던 루터는 “모든 크리스천은 성경을 읽어야 하고, 성경을 공부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루터는 비텐베르크에서 새로운 교회 형성에 힘썼는데, 처음에는 멸시하는 의미로 불렸던 “루터파”라는 이름이 마침내 루터파 교회라는 일반적인 명칭이 되었다. 루터는 참된 복음을 전하는 교회를 세우는 데에만 힘써, 종교개혁 과정에서 파생된 과격파나 농민운동·농민전쟁에 대하여는 성경적 입장을 취해 그들과의 사이에 분명한 선을 그었다. 루터는 만년에 이르기까지 카톨릭교회와 종교개혁 과격파들과 논쟁하며, 성경 강의·설교·저작·성경 번역 등에 헌신했다.
이 일을 하는 동안 루터는 자신을 다만 하나님의 도구로 보았다. 루터의 일생을 보면, 그의 삶의 바탕이 된 것은 “하나님이 그것을 하신다”였다. 면죄부 논쟁에서 시작하여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그는 자신의 탁상담화와 편지에서 이같이 밝혔다.
“이 일에 나는 하나님에 의해 끌려갔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나는 집어던져졌다.”
온화한 성품과 독창적이고 뛰어난 재능을 겸비한 루터
루터는 온화하여 사람을 잡아끄는 힘을 가지고 있었으며, 뛰어난 기억력을 지니고 있었다. 독일 역사상 루터보다 성경을 더 자세하게 안 사람은 없었다고 일컬어질 만큼 루터는 성경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구약과 신약 모두를 한 마디, 한 마디 그대로 인용할 수 있었다. 실수도 거의 없었다. 성경 외에도 고전과 교부敎父들의 작품, 그리고 이전에 읽었던 자료들을 잘 기억했다. 루터는 그 거대한 정보 창고 속에 있는 자료들을 마음대로 이용하여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글을 써내려갔다. 어떤 사람이 그를 공격하면 그 답변이 수 주일 내에 신문에 실렸다. 그는 고쳐 쓰지 않았으며, 거의 퇴고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두뇌에서 나온 사상의 풍부함과 다양함은 실로 놀랄 만하다.
루터의 독창적인 창조정신과 예리한 개성도 놀랄 만한 것이었다. 그는 처음에는 오컴, 아우구스티누스, 기타 사람들의 가르침을 따랐지만 얼마 안 되어 그들 또한 신뢰할 수 없는 안내자라는 사실을 알았다. 한동안 자신을 매료시킨 타울러Johann Tauler의 작품들을 읽었지만, 그는 언제나 모든 것을 절대적 기준인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사고했다.
신학 다음의 자리에 음악을 놓다
루터는 찬송을 굉장히 귀하게 여겼다. 그는 가족과 함께 찬송함으로 많은 어려움과 시련을 극복하고 큰 위로를 받았다. 그에게 있어서 찬송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였다고 봐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잘못된 신앙을 가진 모든 자들에게 그러하듯, 나는 누구든지 찬송을 함부로 무시하는 자들에게 동의할 수 없다. 음악은 하나님께서 내리신 재능이며 선물이기에 귀신을 쫓아내고 사람들의 심령을 기쁘게 만든다. 또한 음악은 모든 분노, 불순, 거만, 그리고 다른 무거운 짐들을 잊게 한다. 나는 신학 다음의 자리에 음악을 놓으며, 최고의 영예를 부여하고 싶다.”
“음악은 나에게 새로운 영적 힘이 되었으며, 듣는 이들에게 감동을 주어 말씀을 전할 때 설교에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루터는 아내와 자녀들과 함께 자신이 직접 라오테(기타의 이전 단계 악기)를 연주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는 즐거운 시간을 수시로 가졌다고 전해진다. 독일의 화가 슈팡엔베르크는 1866년에 그러한 루터의 가정을 연상하며 그림을 그렸는데, 이 그림에서 인상깊은 장면은 루터의 동료 멜란히톤이 함께하여 루터 가족의 아름다운 합창을 흐뭇한 얼굴로 듣고 있다는 것이다.
스위스의 개혁자 쯔빙글리와의 결별
루터와 그의 동료들이 독일에서 개혁을 진행하고 있는 동안, 스위스의 독일어 사용 지역에서는 쯔빙글리(1484~1531)가 개혁을 주도하고 있었다. 그는 루터의 영향을 받았지만 성만찬에 대한 견해가 루터와 달랐다. 쯔빙글리는 루터의 주장이 ‘화체설’을 주장하는 카톨릭교회의 입장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쯔빙글리는 “십자가의 구속을 이루신 그리스도가 성만찬에 실재實在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누구나 교황을 따르는 사람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누가복음 22장 19절을 루터는 “이는 내 몸이라”고 번역했지만, 쯔빙글리는 “이는 내 몸을 의미한다(가리킨다)”로 번역했다. 이로 인해 루터는 쯔빙글리와 결별해 또 한 명의 지지자를 잃지만, 서로 적대시하지는 않았다.
영적으로 성장하며 야고보서에 대한 시각이 변하다
종교개혁 시작 무렵에 루터는 야고보서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1522년 9월에 독일어로 번역한 신약성경을 출판하면서 그는 서문(Preface to the New Testament)에서 ‘야고보의 서신은 다른 성경들과 비교했을 때 지푸라기 같다. 복음의 본질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재판再版부터는 이 부분이 삭제되었다. 루터 자신이 직접 삭제한 것이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 루터는 야고보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야고보의 서신은 옛 사람들에 의해 거부된 적이 있지만 나는 그것을 찬양하며, 그것을 좋은 책으로 여긴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의 교리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을 힘 있게 전하기 때문이다.”
루터가 처음에는 야고보서, 히브리서 등을 바울이 쓴 로마서, 갈라디아서 등에 비해 매우 낮게 평가한 것이 사실이다. 야고보서가 믿음에 기초한 행함을 강조하고 있어, 자칫하면 인간의 행위에 의하여 구원받는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하기 때문이었다. 루터는 야고보와 바울을 조화시키기 어렵다는 이유로, 율법과 행위를 뒤섞어 놓는다는 이유로, 그리고 야고보가 성경의 정신을 침해하고 있다는 이유로 ‘성경이 말구유라면 야고보서는 강보 밑의 지푸라기와 같다’고 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야고보서를 정경에서 제외시킨 것은 아니었다. 신약성경을 번역할 때 27권 전체를 번역했다.
그 후 루터는 믿음과 행함의 관계가 정확하게 정립되면서 야고보서나 히브리서가 얼마나 귀한 하나님의 말씀인지를 밝히 깨닫게 되었다. 루터에게도 처음에는 부족함이나 미숙함이 없었던 것이 아니지만, 복음을 향해 달려나가고 성경을 연구하면서 영적으로 성장해 갔음을 알 수 있다.
몸이 약했지만 자주 전도여행을 다니다
이겨내야 하는 외부의 거대한 압력, 대중의 관심 집중으로 인한 과도한 긴장감, 사람들이 요구하는 여러 사항들, 이 모든 것들이 좋지 않았던 루터의 몸을 말년에 더 약화시켰다. 어떤 사가史家들은 “루터의 체력 약화가 그에게 악영향을 미쳐 나이가 들수록 루터는 성미가 급해지고 조급증이 심해져, 자신과 다른 신념이나 관점을 가진 사람들을 점점 용납하지 못하였다”고 평했다. 어떤 사가는 “루터가 만년晩年에 쓴 글을 보면, 자기 주장의 정당성을 입증하려고는 하지 않고 자신의 논점이 옳다고만 주장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아마도 루터는 자신을 끈질기게 따라다니던 투쟁과 대립에 지쳐 더 쉬운 길을 택한 것 같다. 이러한 경향은 … 과거 그의 향기로운 합리성에 매료되었던 많은 지지자들을 떨어져 나가게 했다”라고 평했다.
건강하지 못한 몸은 루터에게 약점이었다. 그의 몸은 불편하지 않은 때가 드물었고, 그는 약한 몸으로 인해 고통에 빠질 때가 많았다. 그러나 루터는 바쁜 중에도 약한 몸을 이끌고 자주 전도여행을 다녔다. 1521~1522년 이전에는 말을 타고 다니거나 걸어서 다녔는데, 로마까지도 걸어서 갔다 왔다. 루터의 여행을 자세히 연구한 학자는 그가 한 여행 거리가 약 20,500km이며, 그 중 약 8,000km를 걷거나 말을 타고 다녔다고 추산했다.
루터의 죽음
수도승 시절의 혹독한 고행, 아우구스부르크·보름스·바르트부르크에서 보낸 압제의 시간들로 인해 루터의 몸은 엉망이 되었다. 통풍, 결석, 소화불량, 두통, 심장질환, 중이염 등 만성질환에 시달렸다. 1527년에는 질환이 심각해져 설교를 중단해야 하는 일까지 생겼다. 1537년에는 담석증에 걸렸고, 그의 둘째 딸 막달레나의 죽음으로 그의 건강은 더욱 악화되었다. 루터는 전염병을 피해 먼 곳에 가 있던 멜란히톤에게 또 다른 병에 걸렸노라고 편지를 썼다. “나는 벌써 한 주간 이상을 죽음과 지옥에서 헤매고 있네. 온 몸은 고통에 빠져 있고 지금도 떨리고 있네.” 찬송 <내 주는 강한 성이요>는 바로 이러한 배경 아래서 만들어졌다.
1546년 초, 루터는 만스펠트 가문의 거만한 두 젊은 제후의 영토 분쟁 문제를 중재하러 아이슬레벤으로 오라는 요청을 받는다. 그는 늙고 병들었으나 눈보라치는 겨울에 길을 떠났다. 그의 부인은 불안해서 어쩔 줄 몰랐다. 부인에게 보낸 루터의 편지는 그녀를 조바심이 나게 만들기도 하고 위로하기도 했다. 루터는 마침내 부인에게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했다는 기별을 보냈다. 그러나 몇 시간 후, 과로한 그의 몸에 죽음이 찾아왔다.
2월 18일 밤, 루터는 그의 두 아들 마르티노와 바오로, 만스펠트 가문의 알브레히트 백작 부부, 옛 학우인 유스토 요나스, 의사 등이 둘러선 가운데 마지막 순간을 보내고 있었다. 새벽 3시가 되어갈 무렵 요나스 박사는 마지막이 이른 것을 알고 루터에게 물었다.
“선생님은 선생님께서 가르치신 교리와 그리스도 위에 굳건히 서서 돌아가시겠습니까?”
루터는 몸을 움직이면서 큰소리로 “예!” 하고 대답하였다. 그리고 숨을 거두었다. 그의 나이 63세였다.
루터의 장례식은 멜란히톤의 주재로 2월 22일에 거행되었다. 멜란히톤은 “그는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살아 있습니다. … 루터는 구약시대부터 교부들로 이어지는 자랑스러운 스승과 예언자 반열에 드는 위대한 인물이었습니다”라고 설교했다. 루터의 유해는 곧 비텐베르크로 운구되었고, 29년 전에 그가 95개 조항을 써서 게시했던 비텐베르크대학 교회에 안장되었다.
마르틴 루터 이야기를 마치며
루터는 말씀의 사람이었으며, 기도의 사람이었다. 마르틴 루터는 교회사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유럽의 역사에 전환점을 가져다준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루터가 부르짖은 진리는 이렇게 요약된다.
오직 성경으로! Sola Scriptura!
오직 은혜로! Sola Gratia!
오직 그리스도로! Sola Christus!
오직 믿음으로! Sola Fid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