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고3 시절 완전한 모범생이었다. 반에서 1등을 한 번도 놓쳐본 적이 없다. 부모님께 잔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선생님께 야단 한 번 맞아본 적도 없다. 친구랑 말다툼 한 번 한 적도 없다.
공부만 하며 학교와 집 사이만 시계추처럼 왕복하는 모범생 생활 속에서, 내가 세상과 소통하는 통로는 한방 가득히 꽂혀 있는 각종 위인전과 세계 명작, 한국 고전, 수필집 같은 책뿐이었다. 그리고 새벽까지 날 위로해주는 것은 라디오 속 음악과 DJ 음성뿐이다. 그렇게 책과 음악은 내가 세상을 나가기도 전에 완벽한 고정관념을 만들어 놓았다. 센티멘탈하고 멜랑꼴리한 감성적인 관념만.
겉으로는 너무나 명랑한 표정을 짓고 있는 탓에, 가족이나 친구들 중 그 누구도 내 마음에 검은 그림자가 잔뜩 드리우고 있는 걸 눈치 채지 못한다. 물론 나는 내 고통을 드러내 보이지도 않는다. 그저 작은 머리통으로 생각만 한다. 많은 책들 속에서 답을 찾으려고만 한다.
‘나는 왜 이렇게 열심히 공부를 하는가?’
‘나는 무엇이 되려고 하는가?’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내 삶은 이 큰 세상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
‘나는 도대체 왜 이 큰 지구 속에서 하필 이 작은 한국에 왜 이런 집에 왜 이렇게 태어났는가?’
태어남에 대해 간절히 고민하다 보니, 막대 자석의 양극과 같은
‘죽음’을 갑자기 떠올린다. 갑자기 관심의 화두를 ‘탄생’에서 ‘죽음’으로 슬며시 옮긴다. 시작점도 모호한데, 머리로 인생을 그리다 보니, 결국은 인생의 마지막은 ‘죽음’이라는 생각에 다다른다. 생각은 생각을 더하고 그 생각은 나를 끝없는 무력감으로 끌고 가기 시작한다. 결국은 이렇게 살든, 저렇게 살든, ‘인생은 다 죽는다’라는 생각에 이른다. 내 정체성을 찾기 전에는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다는 묘한 무기력증에 빠진다. 그냥 그렇게 생각한다.
‘죽음은 탄생을 설명해 줄 수 있지 않을까?’ 창조주가 있다면 물어보고 싶고, 없다면 그냥 끝내도 좋다는 생각이 든다. 생각이 거기에 이르자, 준비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다. 난, 바람 부는 작은 강물에 마른 낙엽처럼 내 몸을 떨어뜨린다. 그러나 묘하게도 한 치의 두려움이나 고통 없이 창조주는 내게 생명을 더 연장해준다. 너무나 원망스러운 ‘창조주’다.
원치 않은 삶을 연장하게 된 나는 매일 매일이 힘들었다. 똑같은 하루를 매일 반복해가는 것이 싫었다. 그렇게 난 30여 년을 그냥 흘려버렸다. 남들처럼 결혼도 하고 아들딸도 키우고 열심히 사는 듯 보였지만, 내 마음 속은 언제나 끝내지 못한 ‘죽음’에 대한 동경이 있었고 여전히 이 세상은 어떻게, 왜, 존재하는지에 대한 궁금증과 불만이 많았다.
그러던 중, 작년에 친구 따라 강남 가듯 따라온 ‘기쁜소식선교회’에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작은 소망을 보았다. 그토록 알고 싶었던 세상의 존재 이유와 나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되었던 것이다. 내가
‘흙’이었다니....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매었던 나의 존재가 ‘아무것도 아니었다’라고 하니.... 내가 지금까지 ‘생각’이라는 허상에 속고 살았다니....
나를 50여 년간 지탱해준, 나의 개똥철학이, 세상 관념이, 너무나 어이없는 평가절하를 받아야했다. 내가 그토록 알고 싶어 했던 이 세상의 존재 이유와 시작과 끝이, 성경이라는 책 속에 고스란히 들어 있는 것을 알았다.
처음에는 받아들이기 너무나 어려웠지만, 평생 스트레스성 두통에 시달렸던 내가, 두통이 사라진 시작 날이 그날이었다고 기억한다. ‘구원’에 대한 말씀을 듣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환희나 기쁨과는 다른, 잔잔히 느껴지던 뒤통수의 개운함을 잊지 못할 것이다.
30년이 걸린 내 문제에 대한 해답!!!
‘오..., 하나님....’
그때쯤 읽게 된 <나를 끌고 가는 너는 누구냐>란 책 속에서, 나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모두 보았다.
내가 10대 때, 마음을 표현하는 법을 배우지 못해서 가족들에게 내 병든 마음을 전하지 못하고 달팽이처럼 스스로 고립되었던 것이었구나. 그 고립의 결과는 ‘죽음’이라는 단어와 친구가 되게 했던 거였구나. 책장 속에서 읽은 작은 지식만으로 채워진 내 이성과 양심을 이 세상 누구보다도 선한 도덕심이라고 여기며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비웃으며 살았구나. 그래서 난 그 누구도 진정으로 사랑해 본 적이 없었구나. 내 인생은 나만 풀 수 있었다고 생각한 것이 얼마나 교만이었던가? 그러나 나는 그럴 수밖에 없었구나.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또 그렇게 마음이 흐르겠구나. 내 마음 속에 나를 지으신 ‘하나님’이 없었으니까.
난, 인생을 지금 다시 시작하고 있다. 나를 끌고 가는 주인을 바꾸고 나니, 아니, 원래의 주인을 되찾고 나니, 지금 내 마음에 새 길이 나고 있다. 평생 막혀 있었던 길이 뚫리고 있다.
이제 그 길로 무언가가 흐를 것이다. 마음과 마음이, 기대와 소망이, 감사와 평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