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 종교인들의 금서 이사야 53장
오래 전, 랍비가 되기 위해 교육을 받고 있는 어느 유대 종교인과 성경을 펴놓고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나는 예수님이 성경에 기록된 메시아라고 하고, 그는 예수님은 메시아가 아니라며 변론했다. 나는 구약 성경 가운데 예수님을 가장 잘 표현한 말씀인 이사야 53장을 히브리어 성경에서 펼치며 보여주려 하자 순간 친구는 기겁하며 얼굴을 다른 쪽으로 휙 돌리고 몸을 일으켜 물러섰다.
“왜 그러십니까? 내 성경에 뭐라도 묻었습니까?”
“당신이 지금 편 성경이 이사야 53장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나는 내 눈으로 그것을 읽을 수 없습니다.”
곧바로 그는 이유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과거 일부 유대 종교인들이 이사야 53장을 읽다가 ‘혹시 여기에 나온 선지자가 기독교인들이 주장하는 예수가 아니야? 그렇다면 나사렛 예수 바로 그가 메시아란 말인가?’라고 하며 문제를 일으킨 적이 많았다고 했다. 그래서 모임의 랍비들이 결정하기를 ‘모든 교육생들은 집에서 혼자 앉아 이사야 53장을 읽는 것을 금한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혼자서 이사야 53장을 읽는 것은 아주 위험하니 읽고 싶으면 ‘예쉬바’ 즉 성경공부 모임에 와서 랍비나 다른 선생님들이 있는 곳에서 함께 질문하며 읽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그의 친구들 가운데 어떤 이는 이사야 53장이 눈에 띄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 부분에 종이를 붙여 놓은 사람도 있다고 했다.
유대인 친구에게 이사야 53장 4절을 읽어 주며
나는 친구의 설명을 듣고도 고개를 계속 돌리는 그에게 이사야 53장을 극구 읽어 주었다. 이사야 53장 4절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를 읽는 도중 그 친구가 물었다. “네가 믿는 예수는 율법을 어기고 하나님께 죄를 지어 벌을 받아 매를 맞은 거야. 우리는 그렇게 생각해.” 나는 다시 이사야 53장 4절에서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부분을 읽어 주며 “여기를 봐. 너희가 그렇게 생각한다고 이미 성경에서 보여주고 있잖아. 그래서 이 성경 말씀을 마음의 거울이라고 하는 거야.”라고 말하자 그가 얼굴을 붉히며 가버렸다.
그날 나는 ‘내가 만약 친구처럼 유대 종교인으로 태어났다면 어릴 적부터 율법을 배우고 예수님이 메시아가 아니라고 배웠을 것이고, 그렇다면 나도 기록된 말씀대로 저렇게 생각했겠구나.’라는 사실을 알았다.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마태복음 2장 23절에 보면 “…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라는 구절이 나온다. 신약과 구약 성경을 통틀어 ‘나사렛’이란 단어가 처음 나오는 구절이다.
‘나사렛’은 히브리말로 ‘나쯔랏’이라고 한다. 오랜 세월 동안 히브리말로 기독교인은 ‘노쯔리’라고 불려왔다. 그것은 ‘나쯔랏 사람’이란 의미의 단어로서 세월이 지나며 고유명사가 되어 불리게 된 것이다. 요즘은 ‘노쯔리’가 기독교인 중에서도 가톨릭 신자를 통상적으로 가리키기도 한다.
구약에는 전혀 나오지 않았던 동네 ‘나사렛’은 현재 인근 지역을 포함해 인구 20만 명이 사는 큰 도시로서 이스라엘에 사는 아랍인들이 주류를 이루며 살고, 약 8만 명의 유대인들이 정착해 살고 있다. 또한 고대 시대의 멋과 대형 소핑몰 같은 현대적인 멋이 어우러진 신도시로서 기독교인들이 이스라엘에 오면 빠뜨릴 수 없는 방문지로 유명한 곳이다.
그러나 예수님 시대나 그 이전 시대에도 나사렛은 아주 보잘것없고 가치 없는 시골 중에 시골이었다. 요한복음 1장에 빌립과 나다나엘의 대화에서 나다나엘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나사렛이 그만큼 가치 없는 곳으로 여겨져 왔다는 것을 입증해 주는 말이다. 예수님을 ‘나사렛 예수’라고 부른 것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그만큼 경멸하고 낮추어 부른 것임을 알 수 있다.
쉽게 말하면 ‘나사렛 예수’라는 말에는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시골뜨기 예수’라는 뉘앙스가 숨어 있는 것이다. 제자들이 한 번씩 ‘나사렛 예수’라고 표현한 것은 ‘너희들이 천히 여긴 시골뜨기 예수’ 그분이 ‘메시아’라는 것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나사렛과 네쩨르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이 있다. 마태복음 2장 3절 말씀 “…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에 따르면 구약 성경에 선지자가 나사렛 사람이라고 칭하리라고 기록된 곳이 있는 것인데, 그곳이 바로 이사야 11장 1절이다. 그런데 정작 이사야 11장 1절을 펴보면 ‘나사렛’이란 말이 전혀 나오지 않고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라고 나온다. 어떤 사람들은 이 부분이 잘못 표기되었다고 하는데 결코 그렇지 않다. 이유는 히브리어 성경에서 이사야 11장 1절 중에 ‘가지’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음으로 ‘네쩨르’라는 단어를 썼고, ‘나사렛’이라는 단어가 바로 ‘네쩨르’라고 하는 단어에서 파생된 단어이기 때문이다. 즉 ‘나사렛’이란 단어의 원단어가 ‘네쩨르’라는 ‘가지’에서 나왔기에 그 의미로 ‘나사렛 사람’이라고 칭한다고 번역했던 것이다.
이새의 뿌리에서 나오는 못난 가지 네쩨르
‘네쩨르’는 번역하면 ‘뿌리에서 나온 아주 가늘고 볼품없는 연한 가지’라고 해석할 수 있다. 보통 가
지는 나무 기둥의 줄기에서 뻗어나오는 것이 통상적이며, 그렇게 나무 줄기에서 나와야 정상적인 가지로 자라날 수 있다. 그런데 ‘네쩨르’는 중동에 사는 뿌리 식물들 중에 가지가 줄기에서 정상적으로 나오지 않고 뿌리에서부터 밖으로 비정상적으로 쭉 삐져나온 모양의 가지를 말한다. 뿌리인지 가지인지 분간되지 않게 생긴데다가 원 줄기와 상관없이 뿌리 밑에 연한 가지 같은 것이 하나 쭉 삐져나온 모양으로, 볼품없고 보기 싫다. 그래서 나무를 가꾸는 사람들은 나무의 아름다움에 흠이 가지 않도록 상품 가치가 없는 네쩨르를 발로 밟아 꺾거나 칼로 쳐서 제거해 준다.
이런 비정상적인 연한 가지를 ‘네쩨르’라고 하고, 이 단어에서 ‘나사렛’이란 말이 생긴 것이다. 그만큼 볼품없고 형편없다는 의미로 예수님을 ‘나사렛 사람’이라고 불린다고 말한 것이다. 그러기에 이사야 11장 1절에서 ‘이새의 줄기에서 나오는 못난 가지 네쩨르’라고 표현한 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 어떤 모습으로 오실 것인지에 대한 예언이라고 할 수 있다.
누가복음 4장에는 예수님이 회당에 가서 이사야를 펴서 읽으시고 말씀을 전하셨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분의 말씀은 은혜로웠지만, 예수님의 모습이 초라해서인지는 알 수 없겠으나 사람들이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예수님이 나아만, 사렙다 과부 같은 이들이 선지자의 말씀을 듣고 자기 생각을 버리고 선지자의 말씀을 그대로 믿는 부분에 대해 말씀하시자 사람들이 화가 가득하여 예수님을 나사렛 동네가 건설된 첫 동네의 낭떠러지로 끌고 갔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이 하나님의 뜻만 가지고 오신 나사렛 예수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 53:2~3)
이사야 53장의 2절과 3절에는 예수님이 풍채도 없고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모습이 없어서 누가 봐도 부담 없는 초라한 사람의 모습으로 오실 것을 미리 잘 나타내 주고 있다.
그러나 현재 기독교 서적이나 인터넷 혹은 영화에서 나오는 예수님의 모습은 그렇지 않다. 그것은 예수님을 좀 더 좋고 멋지게 표현하기 위해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만든 것이다. 예수님은 영화에서 우리가 보았던 멋지고 잘생긴 모습이 아니라 못생기고 볼품없는 모습으로 오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영상에서 보았던 예수님은 그저 잘생긴 모델이거나 영화배우일 뿐임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이 ‘네쩨르’의 모습으로 오셔서 ‘나사렛 예수’로 불리신 것은 예수님이 권력이나 부를 가지고 오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마음과 약속 그리고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을 가지고 우리에게 오셨음을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만약 예수님이 화려한 하늘 왕권을 가지고 강력하고 위대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다면 세상에 기댈 것 없고 의지할 곳 없는 가난하고 못난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기가 얼마나 부담스러웠겠는가? 가까이 가기조차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반대 모습으로 오셨다. 그렇기에 오히려 힘 있고 화려하고 세상 부러울 것 없이 잘나가는 사람들에게 가까이하거나 만나기 꺼려지는 분으로 나타난 것이다.
또 다른 메시아를 기다리는 유대인들
지금도 유대인들은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다. 이유는 예수님 같은 분이 결코 유대인의 왕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을 부유하게 해주고 성전을 재건해 주며 팔레스타인과 아랍인 문제를 정확히 해결해 줄 수 있는 강력한 힘을 가진 종교 지도자로서의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유대인들은 죽은 뒤에도 메시아가 다시 오면 부활할 것을 믿고 있다. 또한 스가랴 14장 4절 “그날에 그의 발이 예루살렘 앞 곧 동편 감람산에 서실 것이요...” 라는 말씀을 의지하며 부활의 날에 장차 오실 메시아를 만나려고 죽으면 감람산에 묻히기를 모두가 소원한다.
도대체 우리 무리의 죄가 어떤 모양으로 그에게 담당되었는가?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6)
유대인에게 메시아에 대해 가장 적나라하게 표현된 말씀이 이사야 성경이고, 그 가운데에서도 이사야 53장이고, 그 가운데에서 가장 흥분되는 구절이 바로 6절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어느 날 밤, 나는 우연히 히브리어 성경 속에 나타난 이사야 53장 6절을 자세히 들여다보다가 가슴 뛰는 흥분을 주체할 수 없었던 적이 있다.
이사야 53장 6절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라는 구절에서 ‘담당시켰다’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직역하면 ‘충격을 가하여, 혹은 상처가 나도록 강하게 쳐서 넘기다’라는 의미다. 하나님이 우리 죄를 그냥 곱게 예수님에게 넘긴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충격을 받도록 있는 힘을 다하여 ‘퍽’ 하고 쳐서 넘겼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편에서 예수님에게 가할 수 있는 모든 힘을 가하여 완전하게 죄를 넘겼다는 의미고, 험한 말로 표현한다면, 예수님에게 우리 죄를 있는 힘껏 충격을 주어 인정사정없이 처발라버렸다는 의미며, 또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예수님이 우리 죄를 너무 강렬하고 세게 넘겨받아 넘어지고 다치고 충격을 받으셨다는 의미인 것이다.
이사야 53장 6절 말씀을 통해 나는 분명히 우리 죄가 완벽하고 강렬하게 예수님에게 넘어갔고, 그래서 우리 죄는 예수님에게 있고, 메시아 예수님이 그 모든 죄를 지고 가신 사실을 강하게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이제 우리에게 더 이상 죄가 없다는 것을 강하게 말씀하고 계신다. 말할 수 없는 감사와 기쁨, 그리고 감동을 느낀 순간이었다. 만약 누군가가 죄가 아직도 내게 남아 있다고 말한다면, 그는 이 말씀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