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유대 종파 스승 랍비의 말 한마디
몇 해 전의 일이다. 대속죄일이 끝나는 날 저녁에 통곡의 벽에 갔다. 각 종파의 수많은 유대 종교인들이 금식을 마치고 같이 기도하려고 모여 있었다. 기도가 끝나자 어느 회당 광장에서 대랍비가 말씀을 전한다며 종교인들이 구름떼같이 몰려갔다. 나도 한번 들어보려고 따라갔더니 외신기자들도 몇 명 카메라를 들고 와 있었다.
대랍비가 나오는 입구에는 종교인들이 굉장히 많이 몰려 있어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대속죄일이 끝나고 수콧, 즉 초막절이 시작되는 시점이라 사람들 마음이 들뜬 것 같았다. 한참을 기다렸는데도 대랍비가 등장하지 않았다. 대략 한 시간 넘게 기다렸던 것 같다. 이윽고 허름하고 오래된 듯한 옷을 입은 할아버지 한 분이 나타났다. 그분이 바로 대랍비였다. 술렁이던 주변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그리고 대랍비가 말했다.
“올해는 모든 장소에 보통 때보다 더 많이 수카(초막)를 만들어라.”
대랍비는 이 말 한마디만 하고 왔던 길로 다시 돌아갔다. 주변이 술렁이더니 사람들이 찬송을 부르고 즐거워했다. 나와 몇몇 외신기자들은 ‘이 말 한마디가 전부인가? 이 말 한마디를 들으려고 한 시간을 기다렸단 말인가?’하며 허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런데 그해에 아주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초막절은 출애굽 당시 광야 생활을 지켜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념하기 위한 절기로, 집집마다 초막을 만들고 공원 등에도 초막을 만들어 일주일 동안 그 안에서 지낸다. 그런데 그해에는 예년보다 초막이 유난히 많이 설치되어 문제가 됐다. 어떤 공원에는 빈 공간이 없을 만큼 크고 작은 초막이 설치되었고, 어떤 동네에는 예년보다 12배가 넘는 초막이 만들어져 심각한 문제가 생기기도 했다. 특히 종교인 마을의 아파트 주차장이 초막으로 가득했던 기억이 난다.
대랍비의 말 한 마디를 하늘같이 여겨 그대로 따르는 일부 종교인들의 모습을 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현상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기도 했지만 나는 그 랍비가 하나님의 종이든 아니든 전통을 따라 대랍비를 선지자로 여기고 그의 말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알고 온 마음으로
‘아멘’ 하고 따르는 그들의 삶이 무척 인상깊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도 이들의 삶에 대해 생각해 볼 것이 있다는 마음이 들었다.
이스라엘 백성을 지켜왔던 두개의 힘
성경 속에는 이스라엘을 움직여 온 두 개의 큰 힘이 있었다. 하나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고, 다른 하나는 그 약속을 마음에 받은 그 시대의 선지자다. 어떤 사람들은 ‘성전이나 법궤가 더 큰 힘이 있는 것이 아니냐?’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이 성전과 율법을 담은 법궤보다 하나님의 약속과 선지자에 의해 이루어진 사실을 성경에서 자세히 알 수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오셨고, 우리 죄를 씻으신 예수님의 피는 언약의 피다. 그 예수님은 하나님의 약속과 하나님의 뜻을 받은 선지자들의 입술을 통해 증거를 받으셨다. 그래서 지금은 성전과 법궤가 없어도 예수님의 피로 누구든지 거듭날 수 있다. 즉 성전이나 법궤는 없어져도 약속의 말씀과 선지자들의 증거는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시대를 대표하는 선지자들_ ‘엘리야 시대’와 ‘선지자 엘리사 때’
시대마다 그 시대를 대표하는 선지자들이 있었다. 소년 다윗은 왕이 되기 전 목동 시절에 베들레헴을 찾아온 사무엘 선지자를 만나서 하나님의 뜻을 마음에 받아들인다. 아브라함이나 모세가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었던 것과는 달리 다윗은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선지자 사무엘에게 말씀으로 정확하게 전달하신 것을 알 수 있다.
아합 왕이 통치하던 시절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아 가뭄이 극심했다. 이스라엘은 겨울에 비가 오기 때문에 그때 비를 비축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자 아합 왕은 이방신들 가운데 비가 오게 한다는 바알 석상을 전국에 만들게 했다. 그걸 지켜보던 엘리야가 안타깝고 답답한 심정으로
“내 말이 없으면 비가 오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이 말의 뜻은 비가 하늘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지자의 입술에서 온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선지자가 비가 온다고 하면 오고, 비가 안 온다고 하면 안 온다는 것이다. 비가 오길 바란다면 하늘을 바라봐야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지자가 뭐라고 하는지 그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를 만나 가루통의 기적을 이룬 이야기나 엘리사가 나아만 장군의 문둥병을 고친 이야기는 예수님도 아주 특별하게 기념하여 말씀하셨다. 누가복음 4장 25~27절에서 우리는 만왕의 왕 예수님께서 엘리야가 살던 시기를 ‘엘리야 시대’라고 하셨고, 엘리사가 살던 그 시점을 ‘엘리사 때’라고 명하셨음을 알 수 있다. 그 당시 크고 작은 많은 왕이 있었고 감히 넘볼 수 없는 강력한 큰 왕들이 세계에 있었는데 그들의 시대를 다 뒤로하고 예수님은 ‘엘리야 시대’와 ‘선지자 엘리사 때’라고 하셨던 것이다.
누가복음 4장에 나오는 사렙다의 과부나 수리아 사람 나아만은 둘 다 이방인이었다. 이들이 자신의 생각이 틀린 것을 깨닫고 선지자의 말씀을 받아들이자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났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생각하는 종교인들을 향해 ‘너희들은 틀렸다’라고 직격탄을 날리셨다. 이런 부분은 선지자에게 뜻을 보이시지 않고는 결코 일하시지 않는 하나님만의 스타일을 자세하게 볼 수 있는 장면들이다.
암흑기에 창궐한 깨닫는 종교인들
선지자 시대는 하나님이 선지자들에게 말씀하시면 그들이 그 말씀을 그대로 받아서 그대로 사람들에게 전달해 주는 시대다. 누구든지 그 말씀을 마음에 그대로 받아들이면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능력이 그대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말라기 성경 이후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 사백 년의 공백이 있었다. 너무 신기한 것은 그 시기에는 어떤 하나님의 말씀도 기록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그 시기에도 수전절의 기원이 되었던 마카비 전쟁 같은 큰 사건들이 있었지만 중요한 것은 성경에 기록이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참 선지자의 부재로 인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러 가지 어려움으로 고통스러웠지만 예전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서 그대로 전해줄 참된 선지자가 없었던 것이다. 그때는 성경 말씀에 자신의 생각을 섞는 사람들이 선지자의 자리에 앉아 있었고 권력과 지위에 연연해 하며 정치적 다툼을 하던 사람들이 득실댔다.
그 사백 년의 끝자락에 예수님이 오시기 직전에 결국 헤롯 1세 같은 정통성 없는 사람이 유대의 왕으로 세워졌다. 그리고 각기 성경의 해석을 달리하는 종파들이 자신들의 해석이 진리라고 주장하며 우후죽순처럼 일어났다. 그들 중 한 부류가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들이었다. ‘바리새인’이라는 말은 직역하면 ‘해석자’라는 뜻으로, 성경을 해석하여 주석을 달아 이해하는 사람들이었다. 이 바리새인들의 창궐은 곧 말씀을 순수하게 그대로 받았던 시대와는 거리가 멀어졌음을 의미한다. 말씀에 자신이 깨달은 해석을 주석으로 달아놓는 시대가 됐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새 선지자의 시대를 여신 예수님
어느 날 바리새인들 앞에 예수님이 나타나셨다. 예수님이 “소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을 그대로 받으면 말씀의 능력을 경험하는 시대를 다시 여신 것이다. 이에 앞서서 세례 요한이 나타나 예수님이 세상 죄를 지신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전달했다.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믿는 바리새인들에게는 말씀을 그대로 받고 그대로 믿는 예수님의 행보가 눈엣가시 같고 반드시 제거되어야 할 존재였을 것이 틀림없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그 후에 사도 시대를 열어 말씀을 그대로 듣고 믿는 자들에게 그 능력을 경험하는 시대를 열어주셨다. 우리 교회 안에도 이와 같은 말씀의 능력이 힘 있게 흐르고 있는 것을 생각할 때 무척 감격스럽고 감사하다.
예루살렘 신드롬(증후군)
나는 예루살렘에 사는 동안 길거리에서 아주 특이한 사람들을 가끔식 만났다. 미국에서 온 어떤 사람은 자신이 사도라며 동예루살렘 야포 문 앞에서 사람들에게 영어로 말씀을 전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통해 하루 이십 명의 유대인이 복음을 듣고 구원받는다고 나에게 말했다. 어느 날 그에게 복음을 들었다는 사람을 우연히 만났다. 그가 말하길 어떤 미친놈이 너무 재밌게 말하길래 믿는 척해줬더니 아주 좋아하더라고 말했다. 또 어떤 목사는 자기가 에티오피아 유대인에게 기도하자 그가 그 자리에서 일어나 걸어갔다고 했다. 알고 보니 그 에티오피아 유대인은 내가 평소 아는 사람으로, 그는 다리를 전혀 절지 않는데 그를 속이려고 재미로 연기했다며 깔깔 웃었다.
어떤 친구는 예루살렘에 여행을 왔다가 마음이 아주 충만해서 어느 날 자신이 예수님의 계시를 받아 자신이 바로 사도 중 하나라고 했다. 자기 손가락에 침을 발라 사람의 귀에 넣으면 병이 낫는다며 나보고 어디를 고치고 싶냐고 묻길래 차라리 당신의 귀에 침을 발라 넣고 이 증상이 나으면 좋겠다 했더니 그 사람이 버럭 화를 냈던 기억이 난다. 또 어떤 러시아에서 온 아주머니는 매일 금색 띠가 달린 흰옷을 입고 나무 막대기를 들고 다니며
“나는 메시아다”라고 외쳤다. 한때 온 예루살렘이 이 아주머니를 다 알 만큼 유명했다. 어느 날 아주머니가 이른 아침에 어느 가게 앞에서 “나는 메시아다”라고 외치자 물건을 정리하던 가게 아저씨가 “나도 당신이 메시아인 것을 아는데 너무 빨리 왔어요, 메시아면 메시아답게 좀 늦게 오세요. 장사 좀 합시다.”라고 했던 적도 있었다.
이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메시아 혹은 사도라고 자처하며 예루살렘을 다녀간 크고 작은 이야기들이 얼마나 많은지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다. 이러한 현상을 예루살렘 신드롬이라고 한다.
예루살렘 신드롬이란?
예루살렘 신드롬이란, 학자들에 따라 해석을 달리 하는 부분이 있지만 보통 정상적인 사람들이 예루살렘 도착과 동시에 종교적인 정신 이상, 즉 마음의 감정이 극도로 흥분되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무슬림, 기독교인, 유대교인 할 것 없이 종교적인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무슬림들은 죽음을 불사하는 테러를 저지르기도 하고, 유대인들은 밤새 율법서를 주절주절 읽고 기도하기도 하고, 기독교인들은 마치 자신이 사도 바울이라도 된 듯 예수님의 메신저를 자처하며 환상에 젖어 말하며 전도한다. 상태가 아주 심각한 사람들은 선지자를 넘어 자신이 바로 예수라고 하거나 다른 메시아라고 한다.
특히 기독교인들 중에 사도 현상이 뚜렷하게 나타나는데, 곧 자신이 마지막 시대에 마지막 사도로 보냄을 입었다고 주장한다. 비행기 티켓도 포기하고 예루살렘에 그냥 눌러앉아 전도하고 나름 소명의 일을 하다가 결국 문제를 일으키고 나가는 경우들이 종종 있다.
이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예루살렘에서만 느낄 수 있는 어떤 종교적인 감동에 마음이 만취되어 마음이 극도로 흥분되고 감정을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차 올라오는 현상 즉, 종교적 흥분상태가 도를 넘는다는 것이다. 자신이 연약한 존재인지를 잊어버리고 오직 자신이 하나님의 사도라는 생각만 마음에 받아들여 더 이상 대화가 되지 않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들의 마음이 무엇인가에 꽉 잡혀 있다는 것은 잠시 대화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예루살렘이나 이스라엘 자체가 성경과 예수님의 나라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감동을 받을 수 있다. 그것은 기독교인이라면 지극히 정상적인 감정인데 이들은 그 감정이 도를 넘어버린다. 그때 이들의 마음을 바로 잡아줄 어떤 영적인 힘이 필요하다. 이들에게 더 큰 문제는 바로 이런 마음을 잡아줄 바른 인도자가 옆에 없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꼭 자신과 비슷하게 마음이 도취된 사람들만 만나 기도하고 이야기하기 때문에 더욱 심각한 상태가 된다.
어느 뉴스 통계에 따르면 지난 60여 년 동안 자신이 예루살렘에서 사도나 선지자와 같다는 느낌을 받고 실제 그런 행동을 잠시라도 취한 사람이 대략 2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믿을 만한 통계인지 알 수 없으나 그들 가운데에는 자신이 메시아라고 착각한 사람만 백 명이 훨씬 넘는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난다. 이것은 예루살렘 신드롬이 사람의 마음과 정신 세계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지를 말해 주고 있다. 지금도 예루살렘에 도착함과 함께 일어나는 종교적 흥분이 도를 넘어 자신을 사도나 메시아로 만들어 버리는 현상은 계속되고 있다.
이스라엘 안에서도 여러 종파가 자신들이 믿는 랍비가 메시아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 가운데 가장 세력이 크고 활동 범위가 넓은 모임이 바로
‘하바드’다. 이들은 이미 타계한 ‘밀루바비치’라는 랍비를 1990년대 초부터 메시아로 규정하고 본격적으로 유대인들을 상대로 포교활동을 하고 있다. 기존 유대종교인들도 이들을 이단시하고, 이들이 가는 곳마다 적지 않은 종교적 분쟁이 일어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모든 예루살렘 신드롬 현상의 공통적인 특징은 자신은 항상 옳고 또한 예수님보다 자신이 더 필요한 존재이며, 그 어떤 이유든 예수님의 죄 사함은 결코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은 누구일까
과연 진정한 선지자가 갖추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조건은 무엇인가? 예루살렘에 살면서 ‘혹시 나는 예루살렘 신드롬에 걸리진 않았나?’ 생각해 보았다. 분명한 것은 내가 누구인지, 나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정확히 알면 내 마음을 금방 정리할 수 있고, 그 사실을 마음에 유지하기 위해서는 교회가 필요하고 하나님의 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몇 해 전 월드문화캠프 마인드강연 시간에 <죄 사함 거듭남의 비밀>의 저자인 박옥수 목사님은 이런 내용을 강연한 적이 있다.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이 누구인 줄 아십니까?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은 바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발견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자신이 틀렸기 때문에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받고 그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내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알면 예루살렘 신드롬에서 벗어날 수 있는데, 내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알려면 반드시 참된 하나님의 종의 인도가 필요하다. 그러면 금방 자신에게서 벗어나고 하나님의 마음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