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 '주간기쁜소식'과 함께한 20년
[라이프] '주간기쁜소식'과 함께한 20년
  • 글 | 고정연(기쁜소식강남교회)
  • 승인 2024.07.05 09: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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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7월호 기쁜소식
성도 간증

2004년 6월부터 발행되기 시작한 <주간기쁜소식>이 올해로 창간 20주년을 맞았다. 지난 20년 동안, 추석과 설 명절 주간을 제외하고 1년에 50회, 매주 약 11만 부 이상 발행된 <주간기쁜소식>. 수많은 변수가 존재한 주週에도 어김없이 신문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정말이지 하나님의 큰 역사이자 은혜라고밖에 표현이 안 된다. 

2004년 6월 13일, 첫 호를 발행하며
2004년 2월, 박옥수 목사님이 “우리도 신문을 만들자.”라고 하셨다. 그로부터 얼마 후 신문을 만들기 위한 창간 준비 모임이 있었다. 2004년 3월경으로 기억한다. 그날 박옥수 목사님과 심철 장로님, 그리고 봉사할 예닐곱 명의 형제 자매들이 교회 마당 한쪽 나무테이블에 모여 앉았다. 나도 그 자리에 있었다. 그때 목사님이 하신 말씀을 다 기억할 수는 없지만, 목사님이 서울로 부임해 오면서 기도하던 중 하나님이 ‘여리고성과 같이 견고한 서울 사람들의 마음을 어떻게 말씀 앞에 열게 하지? 그래! 신문을 만들고 그 안에 하나님의 말씀을 담아 사람들에게 나눠주면, 서울 사람들의 마음을 열 수 있겠다.’라는 마음을 주셨다고 하셨다. 그렇게 시작된 <주간기쁜소식>에 박옥수 목사님의 주일 오전 예배 설교와 기사를 담아 2004년 6월 13일에 첫 호를 발행했다.
처음으로 만들어진 신문을 들고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지하철에 앉은 승객들, 지하철역을 오가는 수많은 서울 시민에게 신문을 배포했다. 그날 우리가 양재역에서 나눠준 신문을 받았던 분 중에는 교회를 떠나 있던 자매님도 계셨다. 전라도 부안에 사는 분이었는데 친정에 가는 길에 신문을 받았고, 그 일을 계기로 다시 교회로 돌아와 지금은 어느 목사님의 사모가 되셨다. 
그렇게 몇 달 동안 신문을 배포한 후 독자들의 반응이 궁금해 어느 토요일 새벽 신문을 배포하시는 분들과 함께 인터뷰를 하러 나섰다. 독자들의 반응은 놀라웠다. 형제님들이 신문을 배포하고 나면 지하철에 앉은 승객들 대부분이 그 신문을 펼쳐 들고 읽고 있었다. 그날 인터뷰했던 독자들 중 세 사람 정도가 기억에 남는다. 
재수하고 있던 한 청년은 ‘신문에 실린 목사님의 말씀이 힘든 상황에 있는 나에게 희망을 주고 용기를 준다’며 너무 좋다고 했다. 성당을 다닌다는 60대 여성 분은 ‘박 목사님의 성경 이야기가 너무 쉽고 은혜롭다’고 했다. 또 다른 중년 신사 분도 ‘나는 교회에 다니진 않지만 목사님의 설교가 마음에 와 닿는다’고 하셨다. 
우리는 그냥 글을 써서 다듬고, 편집 디자인을 조금 할 줄 아는 사람 몇 명이 모여서 만든 신문 같았는데, 이 신문이 어떤 분들에게는 희망이 되고 그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힘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신문사에서 봉사하는 우리들의 마음이 새롭게 재정립되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주간기쁜소식>이 정식 언론사로 등록되면서 매주 국립중앙도서관에 납본되기 시작한 일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여리고성을 계속 돌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그날 이후 20년 동안 우리는 신문을 들고 전국 곳곳을 돌고 있다. 

 

복음의 일을 함께 하는 사람들도 복음 전도자
<주간기쁜소식> 직원들은 대부분 자원봉사자들이다. 직장에서 하루를 보내고 퇴근 후 모여서 신문을 만든다. 취재는 주로 주말에 이뤄진다. 그래서 항상 시간이 부족하고 실수도 많고 어려움도 많았다. 하지만 우리가 만드는 신문은 단순히 그냥 신문이 아니라 생명을 전하는 매개체였기 때문에, 그 어떤 부분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신문을 기다리는 독자들을 위해 하나의 문장이라도 더 편안하게 읽을 수 있도록 글쓰기 아카데미, 사진 아카데미, 편집 아카데미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공부도 하고 언론사에서 근무하는 기자를 초청해 강의를 듣기도 하며 신문을 만들어갔다. 
지금은 시스템이 안정되어 늦은 밤까지 마감을 하는 경우가 드물지만 초창기에는 마감이 늦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나의 경우 직장을 다니고 어린아이 둘을 키우며 신문을 만드는 일을 함께 해야 할 때가 있었다. 직장에서 퇴근하면 아이들 저녁을 먹이고 재운 후 기사를 작성하는데, 그러다 보면 다음 날 출근해서 일할 때 몸도 마음도 너무 힘들었다. 또 마감할 때 아이들은 잠이 와서 칭얼대는데 일이 끝나지 않으니 ‘애들이 이렇게 늦게 자서 키가 크겠나? 내일 학교도 가야 하는데 일어날 수 있을까? 이렇게 힘든데 신문 만드는 일을 계속 해야 하나?’ 등등 많은 생각이 몰려왔다. 작은 생각 하나가 결국 복음의 일을 그만두려는 마음으로까지 흘러갔다. 
그러던 어느 주일, 박 목사님이 신명기 22장 6절 말씀을 전해주셨다.
“노중에서 나무에나 땅에 있는 새의 보금자리에 새 새끼나 알이 있고 어미 새가 그 새끼나 알을 품은 것을 만나거든, 그 어미 새와 새끼를 아울러 취하지 말고” 
어미 새는 복음 전도자를 뜻하는데, 사람들이 새 생명을 얻도록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를 하나님이 지키신다고 말씀하셨다. 말씀을 들으면서 ‘에잇, 나는 복음 전도자도 아닌데 뭘...’ 하고 있는 찰나에 목사님이 “복음을 전하는 목사님들만 어미 새가 아닙니다. 복음의 일을 함께 하는 사람들도 복음 전도자입니다.”라고 말씀하셨다. 내 마음을 정확히 알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아, 그렇구나. 내가 하는 일도 복음을 전하는 일이구나.’ 하는 마음이 들면서 어렵지만 기쁨으로 신문사에서 계속 일할 수 있었다. 
또 한번은 박 목사님이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시니 필요한 부분을 놓고 구체적으로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아이들이 잠들기 전 “하나님, 아이들이 늦게 자는데 짧게 자더라도 푹 자게 해주셔서 내일 건강한 몸으로 학교에 갈 수 있도록 해주세요.”라고 기도했다. 돌이켜보면 두 아이 모두 병원 한 번 가지 않고 건강하게 잘 자란 것이 신기하고 감사하다. 

내가 3천 명의 성도를 이끄는 사역자라고?
<주간기쁜소식>이 스무 살이 되기까지 어려움이 많았다. 매주 11만 부 이상의 신문을 인쇄하려면 비용이 많이 든다. 재정적으로 어려운 순간도 많았다. 정말 자주 ‘이렇게 해서 신문이 나올까?’ 싶었다. 더이상 신문이 나올 수 없는 상황이 되었을 때 박 목사님은 “신문에 광고를 싣자.” 하셨다. 그때부터 목사님은 가는 곳마다 “<주간기쁜소식>에 광고를 실으면 광고 효과가 제일 좋습니다.”라는 말을 자주 해주셨다. 목사님의 마음을 받은 선교회 내 많은 기업인들이 후원하는 마음으로 광고를 내주셨다. 여수에서 돌산 갓김치 사업을 하시는 분은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20년 동안 광고를 내주고 계신다. 
또 한번은 박 목사님이 “신문 한 부 한 부가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입니다.”라고 하며, 당시 약 30명이었던 자원봉사자들에게 “봉사자 한 명이 3천 명의 성도를 이끄는 사역자”라는 말씀을 해주셨다. 모두가 깜짝 놀랐다. 하나님이 내가 사역자의 마음으로 복음의 일을 하길 바라신다는 마음이 들었다. 

민들레 홀씨처럼 뿌려진 신문, 열매를 거두다
어느 날, 박 목사님이 우리 신문의 마인드칼럼 이름을 ‘민들레’라고 지어주시며 “그동안 민들레 홀씨처럼 뿌려진 신문이 이제 열매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열매 맺는 소식이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셨다. 정말 그때부터 신기하고 반가운 소식이 자주 들렸다. 전국 교도소에서 오는 감사 편지는 기본, 교도소에서 신문을 받아보다가 구원받고 출소해서 지역에 있는 우리 교회에 나오시는 분들도 있었다. 
어느 날, 일반 교회에서 안내 담당자라는 분이 전화해서 “<주간기쁜소식>에 나온 목사님의 설교가 너무 좋아 제가 다니는 교회의 교인들에게 나눠주려고 합니다.” 하며 수십 부를 보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다른 교단의 목사님 한 분은 “교회가 이사했으니 이사한 주소로 신문을 계속 보내주세요.”라고 전화하기도 했다. 
한 분은 지하철에서 오랫동안 신문을 보다가 우리 교회를 찾아와 구원받아 지금은 교회의 구역장이 되었고 매주 토요일 지하철 신문 배포를 함께 하고 계신다. 다 기억이 나지 않을 만큼 이런 기쁜 소식이 지금도 계속 들려오고 있다. 어려운 순간마다 목사님은 말씀으로 신문사를 이끌어 주시고, 신문이 한 주도 멈추지 않고 나올 수 있도록 붙잡아 주셨다. 
<주간기쁜소식>의 사시社是는 ‘세상을 밝고 아름답게 만드는 신문’이다. 취재하기 위해 사람들을 섭외할 때 초창기에는 ‘교회 신문이냐?’며 거절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우리 신문에 실린 기사들을 공유하며 섭외하면 “<주간기쁜소식>은 기쁜 소식만 싣는 신문이네요?” 하며 좋아하고 기쁘게 인터뷰를 승낙해주시는 분들이 많다. 매주 주일 설교를 정리해서 싣고, 매주 취재해서 기사를 싣는 것이 쉽지 않지만 이런 분들이 계셔서 기쁨으로 일하고 있다. 덕분에 외교 문제 전문가를 모아 좌담회를 열기도 했고, 미국 흑인 폭동 30주년 기념행사, 평창 동계올림픽 등 국내외 수많은 소식을 현지에서 취재해 실을 수 있었다. 
지난 6월 3일에는 서울 양재동 aT센터에서 <주간기쁜소식> 신문사 창간 20주년 기념행사를 가졌다. 그동안 우리 신문에 관심을 갖고 인터뷰를 해주셨던 사회 각계각층의 저명한 인사들을 초대해 신문을 발행하신 목사님을 만나게 해드리고 싶었다. 행사를 앞두고 한 분 한 분에게 연락드려 초청했다. 모든 분들이 한결같이 진심으로 축하해주시고 축하영상을 보내주기도 하시고, 또 기념행사에 직접 참석하기도 하셨다. 대한민국 복싱계의 신화를 쓴 홍수환 회장, 히말라야 14좌를 완등한 산악인 김미곤 대장, 한국전기자동차협회 김필수 교수 등 많은 분들이 오셔서 행사를 빛내주셨다. 
박 목사님은 이날 모인 참석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셨다.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우리 죄가 다 씻어졌기 때문에 우리가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 된 사실을 큰소리로 외치셨다. 행사 후 많은 분들이 목사님과 인사를 나누고 사진도 함께 찍으셨다. 대부분의 취재원들이 “행사가 너무 좋았다.”며 “앞으로도 계속 교류하자.”는 후기를 전해오셨다.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하며
6일 동안 여리고성을 돌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두 장병은 아니었다. 여자도 있었고, 어린아이들도 있었다. 모든 백성이 나팔을 들고 소리 없이 여리고성을 계속 돌기만 했다. 그러다 7일째 되던 날 다같이 함성을 외치니 견고한 여리고성은 무너졌다. 20년 동안 연약하고 부족하고 실수도 많은 우리를 통해 신문이 만들어졌다. 20년 동안 서울 시민, 그리고 전국에 있는 많은 독자들의 마음이 견고한 여리고성이 무너진 것처럼 신문에 실린 설교 말씀을 통해 부드러워졌음을 느낀다. 지금까지 <주간기쁜소식>을 통해 일어난 하나님의 역사가 앞으로도 30년, 40년... 계속 이어져서 이 세상을 밝고 아름답게 만들고, 더 많은 사람이 죄에서 벗어나 새 생명을 얻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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