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요
[라이프]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요
  • 글 | 이옥란(기쁜소식강남교회)
  • 승인 2024.10.21 16: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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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0월호 기쁜소식
보배와 질그릇

 

죽음을 생각하며 살다가 구원받은 뒤 하나님은 내 삶에 많은 선물을 가져다주셨다. 가족이 다 구원받았고, 삶이 풍요로워졌다. 아이들이 아플 때에도 교회가 붙들어주어 이겨낼 수 있었다. 하나님, 교회, 하나님의 종, 어려움을 만날 때마다 나에게 힘과 쉼을 주는 따뜻한 피난처다. 

나는 어려서부터 교회에 다녔다. 엄마도 함께 다니셨는데,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 세 살이던 남동생이 죽으면서부터 무당을 찾고 절에 다니셨다. 엄마가 9남매인 집안의 맏며느리로 시집와서 딸 셋을 낳고 겨우 얻은 아들이라 충격이 너무 컸고, ‘절에 다니는 시댁에 시집와서 내가 교회에 다닌 탓에 이런 일이 생긴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초등학교 1학년 때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2년 뒤 남동생을 잃어 나는 죽음에 대해 생각이 많았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하시는 사업마다 잘되지 않아 집안 분위기가 별로 좋지 않았다. 어린 시절을 생각해 보면, 나는 자주 바닷가에 나가 혼자 생각에 잠길 때가 많은 우울한 아이였다. 그래서 교회에 다녔는지도 모르겠다.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힘들다고 생각하며…
중학교 2학년이 되어, 죄를 회개하는 것에 대해 회의가 들었다. 맨날 죄짓고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에 염증이 생겼다고 할까. 차라리 죽기 전에 회개기도를 한 번에 몰아서 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 교회에 다니지 않았다. 중학생 때에는 헤르만 헤세의 책을 많이 읽었다. ‘싯다르타’를 읽고는 해탈에 이르기 위해 마음을 깨끗하게 하려고 애를 많이 썼다. 하지만 나로서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고등학교에 가서는 내 마음을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두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인간의 마음은 내버려두면 안 좋은 쪽으로 흘러간다는 것을.
대학에 들어가 2학년 여름방학 전부터 얼굴에 화농성 여드름이 나기 시작했다. 약을 먹고 나으면 재발하고, 또 재발해서 2학기부터는 수업에 거의 들어가지 못했다. 얼굴에 고름이 차서 밖에 나갈 수가 없었다. 밤에는 깨어 있고, 낮에는 기숙사에서 잠을 잤다. 마음이 힘들어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 성경 속 하나님은 내가 알던 하나님과 다르다는 것을 알았고, 인간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악하다는 사실도 알았다. 한 번 읽고, 두 번 읽고, 성경을 읽을수록 내 죄가 점점 많아져갔다. 예수님은 마음에 미워하는 자마다 이미 살인했다고 하셨다. 
화농성 여드름이 계속 재발해 4학년이 되었을 때에는 살고 싶지 않았다.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힘들다고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버텼다. 매일 자살할 방법을 생각했지만, 천국에 갈 자신이 없어 죽을 수도 없는 아주 비참한 상황이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에 눈물이 났다
4학년 2학기가 시작되어 학생회관에서 친구인 수경이와 오복이를 만났다. 그때 나는 수경이에게 말을 건넬 수 없었다. 내가 알던 수경이 같지 않았다. 그건 아주 놀라운 경험이었다. 몇 년도 아니고 몇 달 만에 보았는데, 그렇게 낯설 수 있다니. 그 느낌이 아주 신기해서 다음에 만나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꼭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놀랍게도, 해양미생물학 수업에 수경이가 있어서 옆에 앉았다. 수업이 끝나고 차를 마시러 가려고 복도를 걸어가면서 친구가 물었다. 
“너는 죄인이야, 의인이야?” 나는 당연히 죄인이었다. 세상에 의인이 어디 있는가? 그런데 수경이는 자신이 의인이라고 하며, 찻집에서 자신이 구원받은 이야기를 했다. 무슨 말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한 가지는 확실했다. 수경이가 믿는 하나님은 능력이 있는데 내가 믿는 하나님은 능력이 없다는 거였다. 
그 주 일요일에 수경이가 다니는 교회에 찾아갔다. 목사님이 설교를 마치며 기도하기 전에 죄가 있는 사람은 손을 들라고 하셨다. 나는 하나의 의식인 줄 알고, ‘다 손을 들 텐데 왜 손을 들라고 할까?’라고 생각하면서 손을 들었다. 그런데 나만 손을 들어서 예배 후 목사님과 상담을 나누었다. 나는 궁금한 게 너무 많았다. 목사님께 이런저런 질문을 쏟아내자, 목사님이 ‘먼저 한번 들어보라’고 하며 복음을 전해주셨다. 그때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이 마음에 깨달아지면서 ‘하나님은 역시 하나님이시구나!’ 했다. 상담을 마치고 나오자 친구가 물었다. 
“구원받았어?” 
“구원이 뭔데?” 
“죄가 있어, 없어?” 
“죄가 없지.” 
“그게 구원이야.” 
그날 집에 가면서 많이 울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에 그렇게 눈물이 났다. 
그 해 겨울에 여드름이 다시 재발해 밖에 나갈 수 없어서 성경만 읽었다. 말씀이 너무 좋아서 성경을 껴안고 잘 때도 있었다. 그때 읽었던 말씀들이 지금까지도 나를 붙들어주는 것 같다. 여드름이 재발했을 때 원망도 했지만, 하나님이 외모에 대해 자유로운 마음을 갖게 해주셨다. 그리고 낫게 해주셨다. 하나님이 내 마음을 먼저 바꿔주시지 않았다면 나는 아직도 흉터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을 것이다. 

“옥란아, 나 구원받았다. 고맙다.”
나는 만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나처럼 듣기만 하면 구원받을 줄 알았는데 친구들은 ‘이해는 되지만 믿어지지는 않는다’고 했다. 나는 지치기 시작했다. 한번은 수양회에 참석해 수양관에 앉아 있는데 눈물이 났다. 나를 통해 구원받은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 너무 슬펐다. 우리 가족들도 그 자리에 함께할 수 있기를 기도했다. 
아버지께서 여객선 사업을 하셨는데 손해가 많아 우리 4남매의 용돈은 조그마한 가게를 운영하시는 할머니께서 담당하셨다. 그래서 나는 돈을 벌면 제일 먼저 할머니를 모시고 세계여행을 하고 싶었다. 구원을 받으니 할머니 생각이 많이 나, 수양회에 같이 가자고 하면 할머니께선 “너나 열심히 다녀라.” 하며 매번 거절하셨다. 한번은 할머니가 아무리 강해도 구원받은 내가 이기겠다는 마음이 들어 수양회에 가자고 다시 전화를 드렸다. 신기하게도 할머니께서 수양회에 가겠다고 하셨다. 친한 친구 분에게도 이야기해 함께 수양회에 참석하셨다. 
할머니께서 처음에는 상담 시간에 ‘내가 무슨 죄가 있냐?’며 펄쩍 뛰셨지만, 수요일 저녁에 복음을 마음에 받아들이셨다. 할머니는 가슴이 뻥 뚫린 것 같다며 기뻐하셨다. 친구분도 구원받아 두 분 다 즐겁게 세례를 받고 수양관에서 내려오셨다. 하나님께서는 할머니를 시작으로 우리 가족들을 수양관으로 불러들여 구원받게 하셨다. 
할머니가 구원받으신 후, 기쁜소식고흥교회 목사님이 시골집에 종종 찾아가셨다. 엄마는 교회 사람들이 찾아오는 것이 무척 싫으셨다고 한다. 내가 집에 가서 하나님 이야기를 하려고 하면 이리저리 피해다니며 듣지 않으려고 하셨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흘렀다. 2006년 봄에 아버지께서 엄마와 함께 부천으로 올라오셨다. 엄마는 원래 화병이 있으셨는데, 아버지와 작은아버지의 불화 때문에 화병이 심해져서 숨을 쉬지 못해 119에 자주 실려가셨기 때문이다. 엄마는 숨이 차서 계단을 올라가는 것도 힘들어하셨다. 
당시는 봄수양회가 있던 시절이라, 엄마에게 봄수양회에 가는 게 어떻겠느냐고 말씀드리자 흔쾌히 가겠다고 하셨다. 그 무렵 엄마는 자신이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하셨다. 수양회에 참석하신 뒤, 수요일 저녁에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엄마는 밝은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옥란아, 나 구원받았다. 고맙다.” 정말 기쁜 소식이었다. 엄마는 구원받은 후 화병이 나아 더이상 119에 실려가지 않아도 되셨다. 
아버지께서는 그 후 엄마를 교회에, 수양관에 차로 태워다 주시다가 3년 뒤인 2009년에 구원을 받으셨다. 동생들도 모두 구원을 받았다. 셋째는 겸임교수 임용에 교인증이 필요해서 우리 선교회 산하 교회에 찾아가 목사님과 이야기를 나누다 구원받았고, 막내는 군대에서 선임이 하도 괴롭혀서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어 힘들어하다가 제대한 뒤 대전도집회에 참석해 구원받았다. 마지막으로 둘째는 동생들이 구원받는 것을 보고 수양회에 참석해 구원받았다. 우리 가족들을 모두 구원으로 이끄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린다. 

그날부터 말씀이 그대로 들리기 시작했다
구원받은 뒤 남자친구 문제로 마음이 힘들고, 남자친구도 내가 많이 변한 것을 보고 고민이 많은 것 같았다. 이 문제를 두고 기도했을 때, 하나님께서 “너는 네 식물을 물 위에 던지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전 11:1)라는 말씀을 마음에 생각나게 하셨다. 우리는 여러 번 헤어졌지만, 이 말씀이 내 마음을 지켜주었다. 남자친구는 법대를 나와 사법고시를 준비했는데, 1차 시험에 합격한 후 나에게 헤어지자고 했다. 인간의 마음이 거짓되다는 성경 말씀이 마음에 깊이 박혔다. 나는 세상이 싫어 하던 일을 그만두고 시골로 내려갔다. 마음이 너무 힘들어서 봄수양회에 참석해, 어느 사모님과 신앙 교제를 나누었다. 사모님은 내가 ‘자신’에게 갇혀서 어둡게 살고 있다고 하셨다. 
로마서를 계속 읽다가 8장 7절 말씀이 마음에 들어왔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 8:7) 나는 내 육신의 생각에 갇혀서 하나님의 법에 굴복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 발견은 내 삶을 새롭게 변화시켰다. 항상 ‘생각’이라는 필터를 거쳐서 들려오든 말씀이 그대로 들리기 시작했다. 말씀을 들으면 그대로 믿어졌다. 놀라운 변화였다. 
수양회가 끝나고 시골집에 가니, 25살인 고모 아들이 간암 말기로 시한부 진단을 받고 고향에 내려와 있었다. 동생에게 성경 이야기를 하자 자기도 천국에 가고 싶다고 했다. 한 달 동안 고모와 같이 병원에 있으면서 복음을 전했다. 동생은 복음이 믿어지자 나에게 ‘이제는 됐다’고 했다. 나는 동생이 나사로처럼 살아날 줄 알았는데, 내가 부천으로 올라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동생은 하나님 곁으로 갔다. 
부천으로 돌아오니 교회를 옮기는 일이 진행되고 있어서 나도 힘에 지나게 헌금을 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어떻게 일하시는지 보고 싶었다.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내가 필요한 것을 미리 아시고 하나하나 채워주셨다. 교통비가 없어 먼 거리를 걸어서 과외를 하러 갈 때도 있었지만, 나는 가난한 시간들을 행복하게 보낼 수 있었다. 

어려운 순간마다 하나님께서 길을 여서서 
남자친구와 결혼한 후, 사법고시를 준비하는 남편을 뒷바라지하며 아이를 키우다 보니 빚이 늘었다. 마음이 짓눌려 자다가 벌떡 일어날 때가 많았다. 더이상 버티기 힘들다는 마음이 들 무렵 남편이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하지만 남편이 변호사로 취직한 곳이 노동자들을 대변하는 곳이라 월급이 적고, 월급도 제 날짜에 들어온 적이 별로 없어서 어려운 삶은 계속되었다. 2008년에 둘째를 낳은 뒤 나는 부천링컨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쳤다. 남편은 술을 마시고 오면 나에게 ‘언제 돈을 벌 거냐?’고 물었다. 나는 항상 ‘내가 돈을 버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도와주는 게 훨씬 낫지 않겠냐’고 대답했다. 어려운 형편 까닭에 교회 일에 소극적으로 지내다가, 역대하 25장의 아마샤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이 마음을 바꾸어 주셔서 복음의 일들에 물질을 드리며 살았다. 그러자 신기하게 남편이 큰 로펌에 스카우트되었다. 안 먹고 안 써도 늘기만 하던 빚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2012년에는 진접에 사두었던 아파트로 이사했다. 세입자에게 문제가 생겨 우리가 들어가서 살아야 했다. 처음에는 ‘하나님께서 내가 부천링컨학교에서 일하는 게 불편하신 건가?’라는 마음이 들었지만, 가서 보니 동서울링컨학교에서 수학 교사를 위해 기도하고 있어서 너무 감사했다. 나는 하나님께서 링컨학교를 얼마나 사랑하시고 학생들을 아끼시는지 직접 지켜보는 행복을 누리며 산다. 이곳은 세상의 법칙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가 머무르는 학교다. 
남편은 더 나은 생활을 위해 내가 돈을 벌길 기다했다가 다시 링컨학교에서 일하자 실망했다. 하지만 남편이 개인 사무실을 열면서 하나님의 은혜로 많은 돈을 벌게 되어 빚이 순식간에 해결되었다. 이후 우리는 대학 입학을 위해 공부하는 딸 혜림이를 위해 강남으로 이사했다. 

하나님과 교회 없이 내가 과연 살아낼 수 있었을까?
2022년 7월이 오기 전까지 우리는 행복했다. 그해 7월에 남편이 코로나에 걸린 후 둘째 예림이가 코로나에 걸렸다. 예림이는 3개월 정도를 침대에서 누워 지냈다. 두통이 심해 이런저런 검사를 받고 약도 먹었지만 차도가 없었다. 하루는 예림이가 시체처럼 누워 있어서 성모병원 응급실로 데리고 갔다. 검사 결과 별 이상이 없다며, 담당 선생님을 소아과에서 소아정신과로 바꾸었다. 나는 남편과 함께 예림이를 데리고 박옥수 목사님께 안수기도를 받으러 갔다. 목사님은 죽을 먹이지 말고 밥을 먹이라고 하며 안수기도를 해주셨다. 음식을 소화시키지 못해 죽이나 누룽지만 먹이다가, 예림이가 밥을 먹으면서 몸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예림이가 학교에 다니게 되었지만, 몸이 성치 않아 제대로 다니진 못했다. 2023년 3월에 학교에서 돌아온 예림이가 교실에서는 숨을 쉬기가 힘들다고 하여 그 후로는 학교에 가지 않았다. 집에만 있는 예림이를 위해 남편은 아이가 좋아하는 뮤지컬 표를 예매하고, 농구나 배구 경기를 함께 보러 다녔다. 혹시라도 은둔형 외톨이가 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다행히 중학교 상담 선생님이 신경을 써주신 덕분에, 예림이가 교실에 들어가지 않고 상담실에서 선생님과 상담하며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예림이의 문제에 적응될 무렵, 대학에 다니던 혜림이가 아프기 시작했다. 편두통 약을 과용한 탓에 약물 부작용으로 심장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자꾸 가슴이 아프다고 하여 병원에 갔더니, 심장으로 가는 혈관이 좁아져 협심증 증상이 생겼다고 했다. 편두통 약은 혈관을 축소시키고, 협심증 약은 혈관을 확장시키고…. 혜림이는 여름방학을 거의 침대에 누워서 보냈다. 
작년 12월, 혜림이가 학교에서 밥을 먹다가 쓰러졌다. 성모병원 응급실에서 여러 감사를 받은 결과 심장에 문제가 생긴 것을 알게 되었다. 맥박이 서맥인데다 혈압도 낮아서 뇌와 다리에 혈액이 공급되지 않아, 기억이 저장되지 않고 제대로 걷지 못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이번에도 남편과 함께 혜림이를 데리고 박 목사님께 안수기도를 받으러 갔다. 목사님은 먼저 복음을 자세히 전해주셨다. 그리고 혜림이에게 심장은 괜찮을 거니 걱정하지 말라 하며 안수기도를 해주셨다. 남편이 복음을 처음부터 끝까지 진지하게 들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작년 9월 1일, 나는 불의한 재판관이 과부의 기도를 들어주는 말씀에 힘을 얻어 세 가지를 기도드렸다. 첫째는 예림이가 중학교를 무사히 졸업하고 고등학교는 정상적으로 다니는 것, 둘째는 혜림이가 건강해지는 것, 셋째는 하고 있던 체인점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는 것이었다. 재판관이 과부의 원한을 속히 풀어준 것처럼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속히 들어주셨다. 예림이는 중학교를 무사히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정상적으로 다니고 있고, 혜림이는 가끔씩 약을 먹긴 하지만 작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건강하게 대학생활을 하고 있다. 그리고 체인점은 1월에 동생에게 넘겼다. 작년을 생각하면 ‘하나님과 교회 없이 내가 과연 살아낼 수 있었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외삼촌의 밝아진 얼굴을 보고 있으면…
올해 5월 대전도집회를 앞두고 서울에 계시는 외삼촌이 생각났다. 봄에 시골에 갔을 때, 외삼촌께서 외숙모 때문에 많이 힘들어하신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외숙모와의 이혼 문제로 외삼촌께서 먼저 연락을 주셔서 집회에 초청하자 흔쾌히 참석하겠다고 하셨다. 71세인 외삼촌은 교회에 가본 적이 없다고 하셨다. 외삼촌과 만나 이야길 나누어 보니, 외숙모와의 갈등이 너무 심해서 자살을 여러 번 시도하셨고, 죽으면 끝이라는 생각을 갖고 살았다고 하셨다. 그런데 재작년에 일곱째 외삼촌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바람에, 자기까지 그렇게 가면 집안이 풍비박산이 날 것 같아서 자살 생각은 접으셨다고 했다. 
마지막 탈출구가 사라진 외삼촌은 외숙모 때문에 스트레스가 극에 달해 잠도 못 주무시고 화가 가슴에 가득 찬 상태였다. 외삼촌께 엄마 화병이 나은 이야기, 내가 화병에서 나은 이야기들을 해드리자 자신도 마음에 평안을 얻을 수 있을까 싶어 집회에 계속 참석해 말씀을 듣고 상담을 받으셨다. 처음엔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도 받아들이지 못하셨고, 나중에는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씻었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자신의 죄와는 연결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설교집 ‘죄에서 벗어나’를 읽으면서 복음을 깨달아 구원을 받으셨다. 
구원받으신 후 외삼촌께서는 잠도 잘 온다며 기뻐하셨다. 지역 모임에 참석해 박 목사님께 안수기도를 받으신 후로는, 폐가 나빠서 오랫동안 끊고 싶었지만 안 되었던 담배가 끊어졌다며 아이처럼 신기해하셨다. 외삼촌의 밝아진 얼굴을 보고 있으면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다. 외삼촌께서는 지금 고향으로 이사 가셔서 우리 부모님과 함께 기쁜소식고흥교회에 다니신다. 실버대학에서 색소폰을 즐겁게 불며 행복해하시는 외삼촌을 보면 하나님께 너무 감사하다.

이 집이 하나님의 일에 쓰이면 좋겠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교회 가까운 곳에 정말 좋은 집을 주셨다. 우리만 살기에는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이 집이 하나님의 일에 쓰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감사하게도 2022년과 올해 월드캠프 기간에 미국 에픽대학교 총장님을 모시고 민박을 할 수 있었다. 2022년에는 총장님만 오셨는데 올해는 학장님도 함께 오셔서 정말 감사했다. 내년에는 총장님 아드님도 함께 온다고 하니 무척 기대가 된다. 에픽대학교 총장님은 기도할 때마다 박옥수 목사님과 우리 선교회를 위해서 기도하셨다. 기도를 들을 때마다 총장님의 마음이 느껴져 참 감사했다. 민박을 할 때마다 온 마음으로 함께해 주는 남편이 감사하고, 혜림이가 기쁜 마음으로 총장님과 학장님의 가이드를 해준 것도 감사했다. 
총장님과 동행한 미국 새크라멘토 교회의 정은석 선교사님은 예림이가 아픈 것을 알고 작년에도 시간을 내서 예림이와 교제해 주셨다. 그 이야기가 예림이 마음에 남아, 가끔 선교사님 이야기를 하는 걸 보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올해는 선교사님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선교사님이 나를 교회로 인도한 친구 수경이(도미니카 김춘권 선교사의 아내 송수경 사모)의 사촌동생이라는 것을 알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하나님께서 친구가 나에게 베푼 은혜를 사촌동생에게 갚게 하신다는 마음이 들었다. 올해는 수경이도 기쁜소식강남교회에서 만나 그 또한 감사했다. 하나님께서 죽지 못해 살고 있던 나를 구원하시고,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입으며 살게 하심에 감사드린다.

구원받은 후 내 인생 고비고비마다 목사님들과 교회가 있었다. 특히 우리 가족이 아플 때마다 박옥수 목사님께서 항상 괜찮다고 하며 우리 마음에 힘을 주셨고, 하나님의 능력을 부어주셨다. 여호와 하나님은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이시다. 교회와 하나님의 종들도 그러하다. 나는 여호와의 날개 아래 피한다는 말씀을 좋아한다. 인생길에 어려움이 찾아와도 그 아래서는 편히 쉴 수 있기 때문이다. 나와 우리 가족이 교회 안에서 이런 놀라운 평안을 누리는 것이 한없이 감사하고, 다른 사람들도 나처럼 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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