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부름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부름을 받아
  • 박민희 편집장
  • 승인 2014.08.13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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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연재 . 성도를 찾아서_김동성 목사

 

1976년 7월, 하나님은 박옥수 목사에게 복음의 일꾼들을 길러낼 선교학교를 세우게 하신다. 그 일에 아무도 동의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종을 감동하여 그 일을 하게 하셨다. 그리고 당신이 쓰실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하여 선교학교로 부르셨다. 40년 가까이 흐른 지금, 국내의 많은 목회자들과 세계 80여 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이 선교학교에서 양성되었다. 시작할 당시에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선교학교 입학
먼저, 선교학교에 어떻게 들어가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하나님이 선교학교에 가고 싶은 마음을 많이 넣어 주셨어요. 열 아홉, 어린 나이였기에 주위에서 거의 반대했지요. 많은 분들이 ‘현실도피냐, 감정이냐, 하나님의 뜻이냐’를 깊이 생각해 보라고 했어요.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하나님이 나를 인도하신다는 마음이 들어 입학신청서를 냈지요.”
고등학교를 그만두고 선교학교에 입학한다는 것이 그 나이에는 내리기 쉽지 않은 결정이기에,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아 다시 물었다.
“어떻게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있었습니까?”
“당시 믿지 않던 가족들이 말하기를, 내가 무언가에 씌었다고 했어요. 하나님의 힘이 나를 사로잡았던 거죠. 학교 담임선생님도 착하던 학생이 갑자기 학교를 오지 않아 선교학교까지 찾아와서 학교에 오라고 권했지만, 내 결심이 굳은 걸 보고 ‘대기업에 취직한 걸로 학교에 보고할 테니 선교학교에 잘 다니라’고 했지요. 당시에 일찍 취업한 학교 동기들이 많았거든요.”
“이제 갓 개교한 선교학교. 무얼 배우고, 졸업하면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무슨 생각으로 선교학교에 들어가고자 했습니까?”
“당시에는 목회자가 되겠다는 생각이 없었어요. 그냥 성경을 배우고 싶었고,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마음이 미친듯이 그냥 선교학교에 끌렸어요. 선교학교를 가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았어요.”

성경과 믿음의 길을 배우다
막상 입학해서 본 선교학교는 김동성 형제의 눈에 어떻게 비쳐졌을까?
“시험 들었어요. 입학식에 가서 보니, 학생이 나를 포함해 둘밖에 없었어요(나중에 세 사람이 더 입학했음, 편집자 註). 큰 실망이 찾아왔지요. ‘내가 속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요. 그런데 그때
‘그러면 예수님은 왜 궁궐에서 태어나시지 않고 마구간에서 태어나셨냐?’ 하는 마음이 들었어요. 선교학교도 그런 게 아니냐는 생각이 들어 어두운 마음이 사라졌지요.”
“선교학교에서의 삶은 어떠했습니까?”
“박옥수 목사님 가족과 함께 생활했는데, 굶을 때가 많았죠. 먹을 때도 늘 모자라게 먹었고요. 그 대신에 오전에 갖는 성경공부 시간은 말할 수 없이 좋았어요. 당시에는 박 목사님이 외부에 집회를 인도하러 가시는 경우가 많지 않았기에 거의 매일 우리와 함께 계셨어요. 성경공부 수업이 제대로 된 거지요. 그 시간이 우리에게 아주 행복했어요.”
“수업 시간에는 무얼 배웠습니까?”
“창세기와 출애굽기를 다 배우고, 성막도 다 배웠죠. 요즘 마하나임신학교의 수업 방식과 달리 아주 세밀하게 배웠어요. 한 장의 내용, 거기에 담긴 영적 메시지, 앞뒤 내용과의 연관성 등등. 매일 오전에는 성경 속으로 깊이 들어갔어요.”
“그렇게 배우면서 어떤 마음이 들었습니까?”
“한번은 구원받은 장로교회 목사님이 강의 내용을 적은 내 노트를 보자고 하더니, 가지고 가서 안 줘요. 제가 몇 달을 달라고 했어요. 그분이 노트를 안 주는 이유가, 노트 한 페이지를 보면 한 시간 설교거리가 나온다는 거예요. 그러니 못 주는 거지요. ‘야, 내가 대단한 것을 배우고 있구나!’ 하고 느꼈죠. 자부심도 생기고요.”
“성경을 배우는 것이 좋지만 생활은 굶기도 하고 힘들지 않았습니까?”
“그렇지요. 당시에 기성 교회 목사님들 가운데 박 목사님을 통해서 구원받은 분들이 정말 많았어요. 그분들이 박 목사님과 뜻을 같이하고 싶어했고, 목사님처럼 복음을 위해 살고 싶어했어요. 성경공부에 참석해서 우리보다 말씀을 더 달게 들었고, 우리는 잘 모르는데 그분들은 말씀을 들으며 감탄했어요. 그런데 삶이 겁나는 거예요. 그래서 소속 교단을 못 벗어나는 거예요. 복음에 대한 열정은 있었지만 믿음으로 사는 삶은 감당하지 못해 이전의 삶으로 다시 돌아갔어요. 아주 많은 목사님들이 다 그렇게 되었죠.
어느 날 제가 양복은 얻었는데 구두가 없었어요. 며칠 후, 박 목사님이 교회에서 생활비를 받아 ‘우리, 이거 오늘 다 쓰고 믿음으로 살자’ 하시더니 나에게 중고 구두를 사주셨어요. 남은 돈은 조폐공사 성경공부 가는 여비로 다 쓰시고요. 한 달 생활비를 하루에 다 쓴 거죠. 그리고 남은 날들은 믿음으로 사셨어요. 구원받은 기성 교회 목사님들은 그런 삶을 엄두도 못 내요. 저는 그런 목사님의 삶이 어렵게 보이지 않고 힘있고 좋았어요.”


 
어려움? 재미!
선교학교에서 감사한 일들이 많아도 열 아홉 나이에 자주 굶는 것은 힘들었을 것 같다. 그래서 그런 시간들을 어떻게 보낼 수 있었는지 물었다.
“당시 우리나라 전체가 가난했어요. 우리처럼 굶는 사람은 없었지만, 대체로 힘들게 살았기에 굉장히 어렵다는 생각은 안 들었어요. 사실은, 아주 재미있게 살았어요. 굶어도 재미있고, 밥을 먹으면 더 재미있고.”
“이해가 잘 안 가는데, 어떻게 재미있게 살았습니까?”
“한번은 밤에 지금 기쁜소식구미교회의 장로인 안중식 형제님이 찾아왔어요. 취직해서 월급을 받아 과자를 한 보따리 사가지고 온 거예요. 행복한 시간이지요. 취침 시간이 지났기에 불을 끈 상태에서 과자를 펼쳐놓고 막 먹으려고 하는데, 박 목사님이 오시는 발자국 소리가 났어요. 얼른 다 이불을 덮어썼죠. 그런데 목사님이 불을 탁 켜시더니 이불을 확 젖히시더라고요. 규정을 엄수해야 했기에 마음에서 포기가 되었죠. 목사님이 과자를 다 가지고 가셨어요. 허탈했지요. 그런데 다음날 돌려 주셨어요. 다시 행복해졌죠. 당시에 목사님 자녀인 은숙이와 영국이가 어렸는데, 아이들에게 과자를 줄 생각도 못 했어요. 사실, 과자를 한 보따리 사왔다고 해도 요즘처럼 많은 것은 아니었지요. 여하튼 그런 일들이 무척 행복했어요.
그리고 박 목사님 사모님이 밀가루만 있으면 계란을 풀어서 ‘계란 빵’을 해주셨어요. 그런데 아무리 구워도 남질 않아요. 사모님이 밀가루를 아주 많이 사서 반죽해 빵을 계속 굽는데도 도무지 쌓일 틈이 없어요. 굽는 족족 주어먹으니까요. 그런 시간들이 정말 즐거웠어요.”

나의 원함을 떠나는가, 선교학교를 떠나는가?
“선교학교에 들어왔다가 떠나는 학생들은 없었습니까?”
“형제들이 선교학교에 입학했을 때, 가족들이 어떤 곳인지 궁금해 찾아왔어요. 와서 보니, 30평 남짓한 예배당 홀에서 밥상 펴놓고 성경공부를 하고 있는 거예요. 아무리 작은 학교라도 건물은 있어야 하는데, 그런 모습을 보니 기가 막힐 거 아니에요? ‘잠은 어디서 자냐?’ 하고 물으면 ‘여기서 잔다’ 하고, ‘밥은 어디서 먹냐?’ 하고 물으면 ‘여기서 먹는다’ 하고, ‘교회는 어디냐?’ 하고 물으면 ‘여기가 교회다’ 하니 이해가 안 가죠. 그래서 멱살을 잡고 집에 가자고 하면 안 가겠다고 했어요. 그렇게 한 것을 보면 복음을 위해 살고 싶어서 선교학교에 들어왔는데, 1년쯤 지나자 하나 둘 떠났어요. 1기생 5명 가운데 저 혼자 남고 4명이 나갔지요. 자신들이 꿈꾸었던 것과 맞지 않아 비전이 보이지 않으니까 각자 길을 찾아 떠난 것이지요.”
“목사님은 왜 나가지 않았습니까?”
“저는 나가는 길을 몰랐어요. 집안의 극렬한 반대를 뿌리치고 입학했기에 나가고 싶어도 나갈 수가 없었어요.”

경남 합천군 권빈으로
“학제學制는 어떻게 정해져 있었습니까?”
“1년 공부하고, 다음 1년은 전도지에 나가서 복음을 전하고, 다시 선교학교에 들어와서 1년을 공부하는 과정이었어요. 저는 1년 공부하고, 박 목사님이 청년 시절에 지냈던 압곡동 근처에 있는 경남 합천군 권빈에 가서 목회를 했죠. 1년 후 다시 선교학교에 와서 지내다가 군에 입대했고요.”
“1년 훈련을 마치고 권빈으로 가셨을 당시의 이야기를 들려 주십시오.”
“제가 권빈으로 가기 전 주일에 송별 예배를 가졌어요. 제가 간증하고 형제 자매들이 특송도 하고, 이제 목사님이 말씀 전할 시간인데 사회를 맡은 형제가 말을 못 해요. 아주 재미있는 형제였는데, 우느라고요. 겨우 목사님이 말씀 전하시겠다고 말하고 들어갔는데, 이번에는 목사님이 안 나오시는 거예요. 당시에는 방석에 앉아 예배를 드렸고, 목사님은 앞자리에 앉아 계셨어요. 제가 목사님을 보니까 목사님도 울고 계셔요. 겨우 나와 말씀을 전하시는데, 저는 이유를 몰랐어요. 나중에 알았지만, 다 내가 죽으러 가는 줄 알았던 거예요. 목사님이 압곡동에서 어떻게 지내셨는지 다 알고 있기에 저도 그런 길을 걸을 거라고 생각했던 거예요. 선교학교에서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굶었는데, 거기 가서 엄청나게 굶고 고생할 것을 생각하고 울었던 거예요. 저는 그런 사실을 잘 모르니까 아무렇지도 않았지요.”
“박 목사님은 처음으로 제자를 전도지로 보내는 것이었기에 감회가 남달랐을 것 같습니다.”
“지금은 대구에서 권빈까지 30분이면 가지만 그때는 2시간쯤 걸렸어요. 목사님이 내 이삿짐을 들고 함께 가셨어요. 읍소재지인 묘산에 방을 얻으려고 했지만 마땅한 방이 없어서 권빈에 살던 손을순 모친 집으로 갔지요. 저를 거기 두고 돌아가려고 하니 발걸음이 안 떨어지시는지, 목사님이 ‘내가 대신 여기 남아서 복음을 전하고 싶다’고 하시더라고요. 내가 너무 고생할 것 같으니까 대신 하고 싶으셨던 거지요. 다들 엄청나게 고생할 줄 알았지만, 권빈에서 1년을 보내고 대구로 돌아갔을 때 몸무게가 4㎏ 늘었어요. 그러니까 잘 살았죠. 그때 권빈에서 구원받은 학생들이 많았어요.”
“권빈에 있으면서 대구에 오가고 했습니까?”
“몇 번 왔다갔다했어요. 1977년 가을에 파송을 받았는데, 그 해 겨울 수양회 때 권빈에서 17명이 참석했어요. 수양회 중에 박 목사님이 방에서 기성 교회 목사님들과 성경공부를 하고 계셨는데, 밥 먹으러 갔다가 문 밖에서 목사님이 하시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김동성 형제가 수양회에 17명을 데리고 왔는데, 회비를 다 냈다’고 하면서 자랑스러워하시더라고요.”
“권빈에서 1년 목회하다 선교학교에 다시 오니 어땠습니까?”
“그때는 거의 전도사 대접을 받았어요. 그리고 잠시 있다가 군에 갔지요.”

그 시절에는…
“선교학교에서 지내면서 있었던 에피소드들을 들려 주십시오.”
“학생으로 지내다 선교학교에 들어갔기에 전도를 다닐 때 입을 마땅한 옷이 없었어요. 티셔츠를 입고 전도하니까 사람들이 학생이 공부 안 하고 전도하러 다닌다고 뭐라고 해요. 신사처럼 보이고 싶어서 양복이 필요했어요. 와이셔츠, 넥타이, 구두도 있어야 했지요. 우선 넥타이를 하나 얻어 티셔츠 위에 매어 봤어요. 멋있더라고요. 그런데 옆에서 그렇게 하면 안 된대요. ‘좋은데 왜 안 되냐?’며 그렇게 전도하러 간다고 하니까, 어떤 형제님이 도저히 안 되겠는지 와이셔츠를 하나 주셨어요. 나는 와이셔츠에 사이즈가 있는 줄 몰랐어요. 마지막 단추를 잠갔는데 주먹 하나가 더 들어갈 만큼 컸어요. 거기에 넥타이를 매고 거울을 보았는데, 정말 멋진 거예요. 마침 박 목사님이 지나가시다가 그 모습을 보고는 양복을 한 벌 주셨어요. 세트가 갖춰진 거지요. 구두는 없어서 운동화를 신고 전도를 다녔어요.
그때는 차비가 없어서 몇 십리 길도 걸어다녔어요. 버스 안내양 하는 자매가 있었는데, 그 버스를 만나면 공짜로 탈 수 있었어요. 자매가 안내양으로 있는 55번 버스, 그걸 타고 싶으면 몇 시간이고 기다리는 거지요.
한번은 먼 곳에 걸어서 심방을 갔어요. 돌아올 때는 걸어오기 싫었는데, 심방한 분이 차비를 줄 줄 알았어요. 그런데 차비는 주지 않고 자꾸 밥을 먹고 가라고 해요. 시간이 없다고 하니까, 빵을 사줄 테니 빵이라도 먹고 가라고 해요. ‘저걸 거절하면 돈을 주겠다’ 싶어서 바빠서 가야 한다고 했더니 ‘그러면 잘 가라’고 그냥 보내더라고요. 결국 굶고 걸어왔지요.
유난히 기억나는 일이 하나 있었어요. 그때 기성 교회의 장로님 한 분이 구원받았어요. 굉장한 부자였지요. 그분이 박 목사님께 ‘장로교 신학교를 나와 장로교회 간판을 달고 복음을 전해라. 그러면 내가 예배당과 사택을 지어 주고, 차도 사주고, 월급도 200만 원씩 주겠다’고 했어요. 장로교 신학교에서 공부해야 하는 게 아니라 이름만 올려놓으면 졸업장이 나온다는 거예요. 그 당시 우리 형편에서는 엄청난 제안이었지요. 그런데 목사님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거절하시더라고요. 목사님이 대단해 보였어요.”

개인에게, 전체 교회에 선교학교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선교학생 시절 이후 4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습니다. 목사님의 삶 전체에서 당시는 어떤 시간이었습니까?”
“성경을 많이 배울 수 있는 시간이었어요. 성경의 모든 말씀에는 뿌리가 있어요. 예를 들어 십일조의 경우 그 뿌리를 찾아가면 창세기에 나와요. 거기에서 깊이 있는 해석이 나오고요. 믿음의 뿌리도 창세기에서 찾고요. 모든 뿌리가 거의 창세기에 있어요. 그런데 그때 창세기를 아주 깊이 있게 배웠거든요. 나중에 유명한 <창세기 강해>를 읽었는데, 읽을 게 별로 없었어요. 그걸 이야기했더니 어떤 사람이 ‘그 훌륭한 책을 폄하한다’고 흥분했지만, 그건 사실이었어요. 그만큼 창세기를 깊이 있게 배웠던 거예요. 당시에 배웠던 창세기, 출애굽기, 성막이 내 신앙의 토대가 되었지요.”
“선교학교가 우리 선교회에서 차지하는 의미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선교학교가 있었기에 전도자와 지역 교회가 생기고, 선교사가 일어났지요. 교회가 개척되고, 수양회를 하면 이곳저곳 교회에서 형제 자매들이 모이면서 교회가 빠른 속도로 성장했어요. 그 모습을 보면서 형제 자매들이 교회를 신뢰하는 마음도 깊어졌고요.
그리고 선교학교가 없었다면 박 목사님도 이만큼 활동하시지 못했을 거예요. 매일 학생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훈련하고 파송하고, 이것이 성경적이기도 하지만 목사님이 사시는 길이었고, 복음을 전하는 유일한 길이었던 것 같아요. 선교학교를 통해서 복음이 힘있게 전해진 거죠. 돌아보면, 목사님 사역은 단독 목회라기보다 제자 훈련 쪽에 중점이 있었어요. 교회를 시작하기 전에도 목사님은 주일학교 교사들을 훈련시켜 전국 교회들에 보내 여름성경학교를 인도하며 복음을 전하게 하는 등, 젊은 나이부터 복음의 일꾼들을 양성하는 일을 하셨어요. 그 후 선교학교를 설립해 전도자 양성을 본격적으로 하신 것이고요.”

순수한 마음과 장성한 마음
“삶이 좋아지면서 잃어버린 것들도 있습니다. 지금과 비교해서 당시에는 어떤 것들이 아름다웠습니까?”
“마음이 훨씬 순수했어요. 그리고 성경을 배우는 시간이 많았지요. 꾸중도 많이 들었지만 목사님, 사모님과 가족처럼 가깝게 지냈고요.”
“당시의 순수했던 마음과 주님 안에서 성장한 현재의 마음을 저울에 올려놓으면 어느 쪽으로 기웁니까?”
“지금이 훨씬 무겁지요.”
“어떤 면에서 지금이 무겁습니까?”
“제가 마하나임사이버신학교의 30분짜리 ‘구약개론’ 강의 24시간을 한 달에 다 녹화했어요. 강의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해서 책을 만들고, 그 책을 바탕으로 녹화했는데, 강의 요약을 서재 문 닫아 놓고 하루 만에 다 했어요. 어떤 내용을 강의할지 구약 성경에 나오는 중요한 대목들을 정리하는데, 내 머릿속에서 술술 나오는 거예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어마어마한 것을 배운 거지요.
옛날에 비해 순수한 마음은 잃었지만 우리 안에 형성된 힘이 엄청나요. 그렇기 때문에 박 목사님 같은 분은 돌아가시면 안 돼요. 그냥 한 사람이 죽는 게 아니라, 그 속에 들어 있는 어마어마한 신령한 세계가 사라지는 거니까요. 그런 세계들은 여러 과정을 지나 형성된 소중한 것이에요. 그렇기에 우리가 온 마음으로 목사님께 배워야 된다고 생각해요.”

이제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예나 지금이나 복음 전하길 원했고, 지금도 그 길을 가고 계시는데, 지금 우리는 복음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이제는 교회가 어느 정도 틀이 잡혔잖아요. 도시마다 교회가 세워져 있고, 대도시에는 큰 교회들이 있고, 세계 곳곳에 선교사들과 현지인 목회자들이 서 있고…. 그러다 보니 성도들이 ‘이제 됐다’ 하는 마음으로 안주하려는 경향이 있어요. 이제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다시 시작해야 할 것 같아요. 오래 전, 우리는 주님 오실 날이 가깝다는 마음으로 살았어요. 그래서 저는 아들을 하나만 낳았어요. 혹시 구원 못 받고 예수님 오시면 어쩌나 해서요. 그 후로 세월이 30~40년 흘렀으니 주님의 다시 오심이 더 가까워졌는데, 마음은 더 멀어졌지요. 복음을 위해 살 시간이 이제 넉넉지 않은데, 안정적인 것들 다 버리고 복음에 모든 힘을 쏟아야 할 시점이라고 생각돼요. ‘잃어버린 마음들을 되찾아야 하지 않나?’ 하는 마음이 듭니다.”

나의 소망
“마지막으로, 목사님이 꿈꾸거나 소망하는 것을 듣고 싶습니다.”
“저도 몇 년 지나면 환갑인데, 저를 포함해서 모든 전도자들이 한마음으로 박 목사님 안에 있는 믿음을 흘려받아서 복음 앞에서 힘있게 사는 것이 제 꿈이죠. 우리가 허우적거리고 타락하는 것은 저주가 아니겠어요? 우리에게 선지자의 터가 있는데, 많은 전도자들이 이 터 위에 굳게 서서 온 세계를 복음으로 덮는 게 제 소망입니다.”

김동성 목사와 이야기를 마치고 한참 가만히 있었다. 글로는 표현하기 힘든, 어떤 감동이 마음을 적시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교회’라는 집에는 아버지도 계시고, 삼촌도 계시고, 형님들도 계시고…. 주님 안에서 여러 과정을 지나면서 만들어진 소중한 마음을 지니고 있는 아름다운 분들이 우리 주위에 계시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 문득 마음에 새롭게 와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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