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나는 하나님과 종께 맡겨진 몸이다
이제 나는 하나님과 종께 맡겨진 몸이다
  • 전광희(기쁜소식강남교회 전도사)
  • 승인 2015.04.30 10:4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5월의 간증

 

 

1983년 미국 이민, 사업의 성공, 딸의 죽음, 12년간의 신학 공부. 신학박사 학위까지 받았지만 여전히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절망속을 헤매던 나는 기쁜소식선교회를 만나 죄 사함을 받았다. 그리고 64세의 나이에 비로소 주님께 내 삶을 맡겼다.

나는 1950년 12월 2일 전남 고흥에서 9남매 중 여덟째로 태어났다. 집이 너무 가난하여 석 달 동안 고구마만 먹고 산 적도 있었다. 남들은 어렵지 않게 학교에 다니는데 나는 스스로 학비를 벌고, 집안도 돌봐야 했다. ‘내 인생은 왜 이렇게 비참하지?’라는 생각으로 사회에 대한 반감이 커가며 삶도 삐뚤어지기 시작했다.
 10대 때부터 사람들에게 행패를 부렸다. 벌교와 광주 지역 깡패들과 어울리며 죄도 많이 지었다. 불공평한 사회가 싫고 저주스러웠다. 전쟁이나 났으면 좋겠다고 항상 생각했다. 급기야 이 세상에 살기 싫어서 자살 시도를 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죽지 않고 사흘 만에 깨어났다. 새 삶을 살고 싶었다. 그 후 당시 아주 유명한 미국 로비스트 박동선 씨를 우연히 알게 되어 비서로 일하면서 청와대에 드나들었다. 결혼도 하고 삼남매를 낳았다. 그때는 내가 제일 출세한 줄로만 알았다.

미국에서 새 삶을 시작하며

 

1983년, 나는 박동선 씨의 도움으로 미국 이민을 결정했다. 당시 미국에 간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었기에 로비자금으로 쓰려고 아파트 한 채를 팔아 그 돈을 가지고 갔다. 내 조국에서 살지 못하고 간다는 것이 못내 서러운 마음도 있었지만 아이들에게 좋은 교육을 받게 하기 위한 결정이었다. 미국에 도착하니 한인교회 분들이 마중 나와 주셨고, 우리가 미국에 잘 정착할 수 있도록 집을 얻는 것부터 모든 부분을 도와주셨다. 감사한 마음에 한인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교회에 다니면서 처음으로 성경을 보았고, 하나님을 알았다.
 교회에 다닌 후부터 내 삶도 잘 풀리는 듯했다. 나는 하나님 앞에 세 가지를 기도했다. ‘2년 안에 사업을 하고, 교회에서 직분을 받고, 십일조를 낼 수 있게 허락해 주세요’라고 했는데, 다 이루어졌다. 교회에 다니는 것이 무척 재미있게 느껴졌다. 교회에 다닌 지 몇 년이 지나자 신학교에 가고 싶은 마음까지 생겼다. 그런데 교회 교인들 사이에 싸움이 일어나 3년 동안 3명의 목사가 쫓겨나고 150명의 교인 중에 7명이 남는 것을 보았다. 교회에 실망한 나머지 신학교에 가는 것을 포기했다. 그리고 교회도 나가지 않았다.
 이후로는 아메리칸드림이나 이루어 보자는 마음으로 사업에 주력했다. 사업이 아주 잘되어 한 달에 1억 가까이 벌었다. 큰 집에서도 살고 최고급 승용차도 탈 수 있었다. 자가용 비행기를 살 계획으로 열심히 돈을 벌며 바쁘게 살았다.

큰딸의 죽음이 몰고 온 절망
어느 날, 예상치 못한 절망이 찾아왔다. 나에게는 딸 둘과 아들 하나가 있었다. 미국에 갈 때 큰딸은 초등학생이었고 공부도 잘하고 예뻤다. 미국 학생들은 고등학생이 되면 대부분 쇼핑센터에 가서 친구들과 어울리고 게임에 빠지는데, 큰딸은 학교와 교회에 가는 것 외에 공부만 했고 항상 1등을 했다. 미국에 간 이유 중 하나도 항상 모범생이던 큰딸을 의무교육제도가 잘 된 미국에서 키우고 싶어서였다. 그 딸이 커서 예일대학교에 입학원서를 내고 기다리고 있을 때다.
 뉴욕에 출장을 가 있는데, 큰딸이 교통사고를 당해 상태가 아주 안 좋다는 연락을 받았다. 바로 가는 비행기편이 없어 다음날 새벽 비행기를 타고 집으로 갔다. 도착해서 보니 딸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큰딸을 위해 미국까지 왔는데 그런 딸이 죽었다는 사실이 나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다. 큰딸이 없는 세상은 의미가 없었다. 나는 거의 미친 사람이 되었다. 죽고만 싶었다. 집에 있는 총으로 자살 시도를 했다. 그때 옆에 있던 아이가 덮쳐 총알은 천장을 뚫고 나갔다. 딸을 잃은 고통이 너무 심해 두 번이나 자살 시도를 했지만 죽는 것도 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
 큰딸을 잊어보려고 한 달 간 하와이로 휴양을 갔다. 휴양지에 가서도 딸 생각만 났다. 구름 속에서도 딸이 웃고 파도에서도 딸이 웃었다. 더 미칠 것만 같았다. 한 달간 휴양을 하고 돌아왔지만 정상적인 일상생활을 할 수 없었다. 그 후로도 두 차례나 하와이에 갔다 왔고 그러는 동안 사업도 운영할 수 없었기에 전 재산을 잃었다. 나는 폐인이 되었다.

딸을 만나러 천국에 가고 싶어 시작한 신학공부
죽은 딸의 목소리를 한 번만이라도 다시 듣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때 한 가지 방법이 떠올랐다. 나는 딸이 교회도 잘 다니고 죄 짓는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했기에 천국에 갔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딸을 다시 보려면 내가 천국에 가야 했다. 그러나 나 자신을 보니 어려서부터 깡패 짓을 해서 죄 지은 것밖에 없었다. 성경에 ‘아비의 죄가 삼대까지 간다’는 말이 있는데, 그때부터 내 죄 때문에 딸이 죽었다는 죄책감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딸은 천국에 갔지만 나는 천국에 갈 자신이 없었다. ‘어떻게 천국에 갈 수 있을까?’ 고민했다.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면 천국에 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신학교에 가기로 결심했다.
 맨 처음에는 침례신학교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죄 문제를 해결 받지 못해 종교개혁자인 마르틴 루터 계열의 신학교에 다시 입학했다. 그곳에서도 역시 죄의 문제를 풀지 못했다. 세 번째로 장로교 통합측 신학교에 들어가 석사와 박사 과정을 마쳤다.
 12년 동안 신학 공부를 마치고 목회를 시작했다. 장로교회에서는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행위 중심으로 열심히 기도하고 봉사하고 구제하고 착하게 살아야 한다고 설교한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은 지식적으로 알고 있을 뿐이다. 설교를 하면 할수록 내 마음은 어려워졌다. 여전히 욕망에 사로잡혀 살면서도 선하게 살아야 한다고 설교하는 나 자신이 너무나 가증스러웠다. 설교할 때마다 양심에 가책을 받아 목회를 더 이상 할 수 없었다. 1999년, 결국 후배에게 교회를 넘겨주고 목회를 다시 배우고 싶어 한국에 왔다. 한국에 나와서도 방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 땅에 산다는 것에 소망이 없었기에 항상 죽음을 생각했다.

죄 사함을 받은 날 하루 종일 통곡했다
어느 날, 우연히 ‘박옥수 목사 성경 세미나 죄 사함 거듭남의 비밀’이라고 쓰인 현수막을 보았다. ‘죄 사함 거듭남!’이라는 문구가 내 눈에 확 들어왔다. 장로교에서는 들어보지 못한 생소한 말이었다. 내가 지은 죄가 너무 많았고 내 죄 때문에 자식이 죽었다는 죄책감에 잡혀 살았기 때문에 ‘죄 사함’이라는 단어가 내 마음을 강하게 끌었다. 집회가 열리는 체육관에 찾아가 말씀을 들었다. 그런데 이단이라는 말을 듣고 가서인지 말씀이 잘 들리지 않았다. 신앙서적만 몇 권 사가지고 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LA로 돌아가 책을 읽기 시작했다. 기쁜소식선교회에서 새로운 설교집이 나올 때마다 한 권도 빼놓지 않고 구입해 읽었다. 한국에 갈 일이 생기면 당시 건물 3층에 있던 기쁜소식강남교회에 찾아가 예배를 드렸고, 집회와 수양회에도 참석했다. 수양회 때 복음을 들었지만 마음에 임하지는 않았다. 내가 목사라는 사실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죄 사함 거듭남의 비밀>을 읽었다. 2000년
7월 7일, 모든 죄가 영원히 사해졌고 내가 다시는 죄와 상관없다는 말씀이 하나하나 마음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사야 53장, 히브리서 10장, 그리고 로마서 5장 등 성경 곳곳에 우리의 모든 죄가 십자가에서 이미 끝난 사실이 적혀 있었다. 죄 때문에 평생 눌려 살았던 나에게 너무나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구원받은 그날 아침 9시부터 저녁 5시까지 통곡했다. 박 목사님의 설교집을 읽은 지 3년 만이었다.
 이후로도 한국에 나올 때마다 교회에 가서 말씀을 듣고 집회와 수양회에 참석했다. 말씀을 들으면 막혔던 숨통이 트여 살 것 같았다. 박옥수 목사님도 여덟 차례 만나 악수를 했다. 장로교 목사라는 사실은 말하지 않고 인사만 하고 헤어졌다.
 

교회로 인도하시고 신학교를 가게 하신 하나님
복음을 깨달은 후 아내와 가족에게 그동안 했던 나의 신앙생활이 다 무의미했음을 고백하며 복음을 전했다. 그러나 가족들은 내가 이단에 물들었다며 아주 냉담하게 대했다. 장로교 교단 목사들로부터도 비난을 받았다. 그때부터 나는 이단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다. 기쁜소선교회가 진짜 이단인지 아닌지 파헤쳐보고 싶었다. 이단대책위원회에 들어가서 양쪽 교단의 주장을 면밀히 조사하고 연구했다. 그러나 연구하면 할수록 장로교단의 주장이 모두 기쁜소식선교회를 이단으로 몰기 위한 억지인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의 전화를 받았다. 예전에 사업할 때부터 알고 지내던 장로교회 장로 출신 친구였다. 그는 내게 기쁜소식LA교회를 아는지 물었다. 나는 깜짝 놀라 어떻게 그 교회를 아느냐고 되물었다. 재혼하려는 부인이 있는데 결혼하면 기쁜소식LA교회에 다녀야 한다고 해서 고민스럽다고 했다. 나는 그 친구에게 ‘너는 정말 축복 받았다. 지구상에서 제대로 된 복음을 전하는 교회는 기쁜소식선교회뿐이다. 축하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친구는 다른 사람들은 이단이니 가지 말라고 하는데 나만 강력히 추천해줘서 고맙다고 했다. 당시 나는 구원은 받았지만 장로교단에서 여전히 목회하고 있었기에 교회를 옮길 생각은 하지 못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내가 내게 이혼장을 내밀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어쩔 수 없이 같이 살았지만 아들과 딸이 다 출가했으니 이단에 빠진 나와 더 이상 같이 살 수 없다고 했다. 나는 주저 없이 이혼서류에 사인해 주었다. 이혼한 후에는 목회하는 것이 힘들어 결국 교회 문도 닫았다.
 목회를 그만두고 있던 2012년 8월, 재혼하여 기쁜소식LA교회에 다니는 친구가 연락해 나에게 교회에 같이 가자고 했다. 목회를 그만둔 상황이었기에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교회에 갔다. 말씀을 들으니 내 영혼이 소생하는 것 같았다. 복음이 새롭게 다가왔다. 당시 김상열 선교사님(현 기쁜소식워싱턴교회)은 나에게 왜 구원받았을 때 오지 않았냐고 하시며 지금이라도 박옥수 목사님 아래서 훈련받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그리고 박 목사님께 메일을 보내보라고 하셨다. ‘저는 장로교회 목사입니다. 죄 때문에 고통하다가 <죄 사함 거듭남의 비밀>을 읽고 구원받았습니다. 지금 저는 다 망했습니다. 지금이라도 목사님과 인연이 되면 좋겠습니다’라는 내용으로 메일을 보냈다. 박 목사님은 아주 반가워하시며 답장을 주셨다. 
 

 

2013년 12월, 나는 새로 시작한 지 두 달밖에 안 된 화장품 회사를 정리한 후 한국에 왔다. 기쁜소식강남교회에서 박 목사님을 만났는데, 목사님은 좀 더 일찍 왔으면 아주 좋았을 텐데 하시며 늦었지만 마하나임신학교에 들어와 훈련 받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세 군데의 기성 교단에서 공부하고 박사학위까지 받으며 60세가 넘었기에 나 스스로 신학교에 들어간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는데, 하나님은 친구를 통해 기쁜소식LA교회에 나갈 수 있게 해주시고 또 박 목사님을 통해 신학교로 이끌어주셨다.

내 생각을 따라가는 것은 곧 사탄을 따르는 것이다
2014년 1월, 드디어 신학교에 입학했다. 박 목사님께 신앙 훈련을 받고 싶은 마음 하나로 들어왔지만 사업할 때 한 달에 1억씩 벌고 수십 명의 직원을 거느리며 기성교단에서 목회하던 내가 신입생이 되어 공부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부부가 신학교에 들어온 경우에는 방을 별도로 주지만 혼자인 경우에는 여럿이 한 방에서 공동생활을 하는데, 혈기왕성한 젊은 학생들과 지낸다는 것도 무척 힘든 일이었다. 또 오전에 신학교 수업을 받고 오후에는 전도하러 나가는데, 아무리 전도하려 해도 되지 않아 공원에서 놀다 올 때 마음이 무척 어려웠다. 신학교의 규율을 잘 몰라 어긴 적이 있는데 그때 반장의 간섭이 너무 심하다고 느껴져 짐을 싸고 나가려고 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내가 훈련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은 복음이 좋고 박 목사님의 말씀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또한 힘든 일이 있을 때면 한국에 오기 전 새로 부임한 LA교회 안종령 선교사님이 ‘형제님이 하나님만 믿으면 하나님이 모든 것을 이루시니 믿어 보세요’라고 하신 말씀이 생각나 어려움을 이기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신학교 수업을 들으며 가장 충격을 받은 부분은 ‘내 생각은 항상 악하고 내 생각을 따라가는 것은 곧 사탄을 따르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다’라고 하신 말씀이었다. 처음에는 그 말의 뜻이 무엇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내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나에게서 올라오는 생각을 따라서 일을 결정하고 살았는데, 그것이 다 사탄의 짓이었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라고 하다니....’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는 죄 사함을 받은 은혜에만 취했을 뿐 내 생각이 악하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나는 꼼꼼히 따지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라 그 말씀의 뜻을 하나하나 따져 보았다. 누가복음 23장 31절에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라는 말씀이 있는데 사탄이 내 인생을 밀 까부르듯 했다는 것이 인정되었다. 우리 딸이 죽은 것도, 내가 자살하려던 것도 나를 성공하게 했다가 망하게 하고 내 마음을 교만하고 비참하게 만든 그 모든 것이 사탄의 장난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이 말씀은 세계 어느 교단에서도 이야기하지 않는 기쁜소식선교회에서만 가르치는 말씀이었다.

예수님이 수많은 병자들을 고치신 것처럼 나도 치료하시겠구나
내 생각이 악하다는 말씀의 의미를 깨달으며 나 자신을 부인한 후 나는 스승이신 박 목사님이 말씀하시고 가르치신 것을 그대로 따라 했다. 그때부터 신기한 일들이 일어났다. 박 목사님이 목회 초기 장팔리에 살며 먹을 것을 구하셨을 때 하나님이 놀랍게 일하신 것처럼 나에게도 동일하게 하나님이 일하셨다.
 2014년 3월경, 신학교에 들어온 후 몸이 너무 안 좋아 큰 병원에서 건강검진을 받은 적이 있다. 미국 이민 생활 중 받은 스트레스로 인해 온 몸이 망가져 있었다. 위궤양, 십이지장궤양, 당뇨병 등 한마디로 내 몸은 종합병원이었다. 가장 문제가 됐던 것은 당뇨였다. 정상인의 당화혈색소 수치는 6~6.5%인데, 내 경우는 12.7%나 되었다. 혈당이 높은 것은 어느 정도 식사 조절로 낮출 수 있지만 당화혈색소는 하루 이틀 굶는다고 조절되지 않는다고 했다. 수치가 8%를 넘으면 합병증이 오고, 9~10%이면 신체의 일부를 잘라야 하는 합병증이 온다며, 의사가 깜짝 놀라 당장 입원해야 한다고 했다. 당뇨병으로 입원한다는 이야기는 처음 들었다. 의사에게 ‘나는 한국에 신앙훈련을 받기 위해 왔습니다. 훈련이 생명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에 입원할 수 없습니다’라고 이야기했다. 의사는 지금 가면 죽을 것이라고 했고, 나는 죽더라도 입원은 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이야기했다. 의사는 내 뜻이 그렇다면 우선 주사와 약으로 치료해 보자고 했다.
 다시 신학교로 돌아왔다. 그리고 5월에 박 목사님을 따라 버스 투어 집회를 다녔다. 투어 중에 목사님은 ‘38년 된 병자’ 말씀을 전하셨다. 예수님이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하셨다면 그 말의 책임은 예수님이 지시기 때문에 그 말만 믿으면 병은 다 치료된다고 하셨다. 예수님이 ‘나사로가 산다’고 하셨으면 나사로가 사는 것인데 사람들은 그 말을 믿지 않는다고 하셨다. 목사님의 말씀을 들으며 ‘예수님이 수많은 병자들을 고치신 것처럼 나도 치료하시겠구나. 내 세포를 만드시는 분이 내 병 하나 치료 못 하시겠나?’하는 믿음이 들어왔다. 그리고 박 목사님께 “목사님. 병원에서 당뇨라고 하는데 아주 심각하다고 합니다. 안수해 주세요”라고 말씀드렸다.
 나는 그동안 안수를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었다. 하나님의 영에 잡힌 사람이 안수하면 문제가 안 되지만 만약 하나님의 종을 가장한 사탄의 영에 잡힌 사람이 안수하면 악한 영이 들어오기 때문에 장로교 총회장에게도 안수를 받지 않았던 나였다. 그러나 박 목사님을 통해서는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을 확실히 보았기에 마음놓고 안수를 받았다.
 12년이나 신학을 공부했지만 부끄럽게도 나는 성경을 믿지 않았다. 성경은 그저 고전서에 불과하며 사람들이 죄를 짓지 않게 하기 위해 만든 교훈서 정도로만 생각했다. 죄 때문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알고 있었지만 예수님의 능력은 믿지 않았다. 말씀이 역사한다는 사실을 한 번도 믿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기도를 잘 하지 않는 편이었다. 그러나 이후로는 기도가 되었다.
 “하나님, 제가 죄 사함을 받고 이제 신학교에 와서 훈련받고 있는데 당뇨병에 걸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 병을 치료해 주시겠다는 믿음이 들어옵니다. 하나님이 이 병을 치료해 주세요”라고 기도했다. 전에는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과 대화했다고 하면 미친 사람으로 취급했다. ‘하나님이 어디에 있어서 대화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병 문제를 가지고 내가 처음으로 하나님에게 기도했는데, 그때 내 마음에 하나님이 강력하게 말씀하시는 것이 있었다.
 “야, 네가 그런 것을 다 나에게 부탁하냐?”라고 하셨고, 나는
“예, 저는 제 삶을 스스로 살지 못하니 하나님이 다 해주십시오”라고 말했다.
 버스 투어 집회를 마치고 돌아와 병원에 갔더니 당화혈색소 수치가 12.7%에서 6.7%로 떨어져 있었다. 당화혈색소 수치가 1% 떨어지려면 3개월 동안 잘 치료해야 하고, 정상 수치가 되려면 4~5년은 걸린다고 하는데, 나는 한 달 반 만에 정상으로 떨어졌다. 의사도 깜짝 놀라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냐고 했다. 나는 믿음으로 나았다고 말했다. 의사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내 평생 그렇게 행복한 적은 처음이었다
당뇨가 치료된 그때부터 내 삶에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한번은 미국에 있는 딸이 한국에 자기 소유의 빌라가 있는데 세입자가 고의적으로 7개월간 임대료를 주지 않는다며 나에게 해결해 달라고 부탁했다. 훈련을 받고 있는 몸이라 내가 법원에 쫓아다닐 수 없어 일주일 기한을 정하고 하나님께 해결해 달라고 기도했다. 하나님은 6일째 되던 날, 세입자를 만나지도 않았는데 밀린 임대료가 계좌로 들어오는 기적을 보여주셨다. 또 32년간 날씨가 더운 미국 서부 지역에서 살다 왔기에 한국의 추운 겨울을 견딜 자신이 없어 옷을 두고 기도했다. 그때도 하나님은 우연히 어느 형제를 통해 아주 좋은 겨울 외투를 받게 하셨다.
 그뿐 아니었다. 매운탕이 먹고 싶었을 때도, 찰떡이 먹고 싶었을 때도, 어떤 분에게 보신탕을 대접하고 싶었을 때도 다 주셨다. 더욱이 그 전에는 나를 통해 구원받은 역사가 없었는데, 복음을 전하면 구원받는 역사가 계속 일어났다. 지난 3월에는 내시경검사를 했다. 작년 건강검진 때 위에 구멍이 4개 있었는데 깨끗하게 다 나아 있었다. 내게 기적이 일어날 때마다 ‘이럴 수가! 이럴 수가!’ 하며 감탄한다. 그동안의 기적들을 다 기억하지 못할 정도다.
 한번은 전도하려고 지하철을 타고 강남의 테헤란로에 간 적이 있다. 숨이 차서 쉬엄쉬엄 계단을 걸어 지상으로 올라가니 눈앞에 고층 건물들이 즐비했다. ‘저 빌딩은 누가 가지고 있을까? 돈이 엄청 많은 사람이겠지? 그런데 저 사람이 나만큼 행복할까?’ 사람으로 태어나 내 평생 그렇게 행복한 적은 처음이었다. ‘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이 나만큼 행복할까? 하나님이 내 안에 들어와 일하시는 것을 체험하는 것만큼 행복한 일이 세상 어디에 있을까?’ 옷도 누추하고 돈도 없고 배도 고프지만 하늘을 보면 너무 감사하고 행복해서 미친 사람처럼 울기도 했다가 웃기도 했다.

나는 이제 하나님과 종께 맡겨진 몸이다
1년 간의 신학교 훈련을 마치고 2015년 3월 기쁜소식강남교회 전도사로 파송을 받았다. 박 목사님과 보내는 하루하루가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목사님에게 일하시는 하나님을 바로 곁에서 볼 수 있는 것도 감사하고, 또 목사님이 성도들을 어떻게 대하시는지 보고 배울 수 있는 것도 무척 행복하고 감사하다.
 15년 전에 내가 본 기쁜소식강남교회의 모습은 초라했다. 지금은 그때와 비교할 수 없다. 전 세계에 파송된 수많은 선교사들과 단기 선교사들, 매년 각국에서 열리는 월드캠프, 북미 칸타타의 역사들, 대통령이 구원 받고 각국 정부가 우리에게 관심을 보이는 소식들 등 선교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박 목사님이 평생 복음을 전하는 일에 쉼 없이 달려가고 계시기에 모든 일이 가능한 것임을 본다. 요즘은 나도 구역예배에서 말씀을 전하고, 성경공부도 하고, 개인 교제도 하는데, 그 시간들도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내가 한국에 올 때만 해도 다시 목회자가 된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죽을 지경까지 갔다가 살아났기에 나머지 인생이라도 신앙을 배워 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런데 신학교에서 훈련을 받으며 박 목사님 안에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을 역력히 보았기에 그분의 제자가 되고 싶었고, 목사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랐다. 그리고 목사님에게 일하신 하나님이 나에게도 동일하게 일하시는 놀라운 역사들을 체험했다. 나는 평생 내 생각에 잡혀 악하게 살았는데, 이 늦은 나이에 하나님과 내가 생명의 관계로 연결된 것이 너무나 감사하다. 나는 이제 하나님와 종께 맡겨진 몸이다. 나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기에 앞으로의 인생도 하나님이 인도하실 것을 생각할 때 감사하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