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편 정통 복음주의의 회개와 길이 다른 한국 교회
제7편 정통 복음주의의 회개와 길이 다른 한국 교회
  • 월간 기쁜소식
  • 승인 2012.11.08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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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 회개에 사로잡혀 있는 한국 교회

지난 2007년 7월 서울 월드컵경기장에서 10만 여 명의 교인들이 모인 가운데 ‘한국 교회 대부흥 100주년 기념대회’가 열렸다. 중앙일보 백 모 기자는 대표 강사였던 옥 모 목사를 인터뷰한 후 ‘교회 존경 못 받는 건 거짓 회개 탓’이란 제목으로 기사를 게재했는데, 한국 교회의 회개에 대해 옥 목사는 아래와 같이 언급했다.       

“주위를 보라. 교회는 날마다 회개하고 있다. 그런데 왜 회개가 필요할까. 바로 회개가 ‘형식’이 돼 버렸기 때문이다. 이건 아주 중요한 포인트다. 한국 교회의 현주소를 보라. 거짓 아닌 ‘진짜 회개’를 할 능력을 잃어버리지 않았는지 염려스럽다. 그래서 교회가 사회로부터 신뢰와 존경을 못 받는 것이라고 본다.”

즉, 한국 교회가 외형적으로는 회개를 중요시 여기고 강조하는 것 같지만, 참된 회개가 아닌 거짓 회개를 하고 있으며, 그로 인해 한국 교회가 사회로부터 신뢰와 존경을 받을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2005년에 한국 교회의 미래를 준비하는 모임과 한국 갤럽이 공동 조사한 한국 교회 평가에서도 ‘목회자와 교인들이 세속화되어 세상 사람들과 다른 것이 없다’는 것이 한국 교회의 중요 문제로 지적되었다. 다시 말해 한국 교회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란 참된 교회의 상(像)과는 무관한 교회인데, 이러한 부분을 자각한 교계도 실추된 이미지를 타파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최근에는 한국 교회를 대표한다는 ‘한국기독교총연합(한기총)’의 해체 운동까지 일으켰고, 결국 개혁을 부르짖으며 지난 4월 19일 ‘한국교회연합(한기연)’이 태동했다. 하지만 한기연 홈페이지에 소개된 인사말을 보면, 여전히 참된 회개에 대해 무지함을 알 수 있다.

“이제 우리는 뼈를 깎는 각오와 결단으로 스스로를 갱신해야 합니다. 그리고 겸허한 마음으로 한국교회의 회복과 부흥을 위해 매진해야 합니다.”(한국교회연합 홈페이지 인사의 말씀)

마틴 로이드 존스는 “자기에 대한 기대를 끝내지 않고 참된 그리스도인이 된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라고 하면서 거짓 그리스도인들이 발생하는 원인을 아래와 같이 지적했다. 

 

“실제로 말씀의 능력에 사로잡힌 적이 없기 때문에 참으로 회개한 적 또한 한 번도 없습니다. 물론 죄를 슬퍼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말로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하지만 실상은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이 많이 생기는 것입니다.”(마틴 로이드 존스, Preaching and Preachers, p.233)

여기서 주목해야 될 부분은 ‘말씀의 능력에 사로잡히지 않으면 참된 회개를 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즉, 하나님으로 말미암지 않으면 참된 회개가 불가능하다는 것으로, 이는 회개의 참된 의미와 회개의 주체에 대한 중요한 언급이다.   


회개(메타노이아), 마음의 교체

회개는 구원과 신앙생활에 반드시 필요하다. 세례 요한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 3:2)는 말로 그의 전도를 시작했고, 예수님 역시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는 말씀으로 그의 공생애를 여셨다. 특히, 역사상 하나님께 쓰임 받은 복음 전도자들은 자주 참된 회개에 대해 강조했다. 이는 거짓 회개에 미혹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17세기의 청교도 설교자 조셉 얼라인(Joseph Alleine)은 조지 휫필드와 찰스 스펄전의 회개에도 영향을 준 자신의 저서 <회개치 않은 자들을 향한 경고>를 통해 사단이 거짓 회개를 만들어 사람들을 속이고 있음을 경고했다.

“사단은 거짓 회개들을 많이 만들어 이 사람은 이 방법으로, 저 사람은 저 방법으로 속입니다. 그래서 저는 실제로는 회개하지 않았으면서도 회개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위험한 오해를 바로잡아 주기를 원합니다.”(조셉 얼라인, An Alarm to The Unconverted, Chapter 1)

거짓 회개는 참된 회개를 하지 못하게 만드는 사단의 무서운 궤계이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단은 단 한 번도 회개하지 않은 채 회개에 대해 심각하게 변질시켜 놓았다. 그래서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회개를 열심히 하면서도 참된 회개는 하지 못해 여전히 죄와 사망 가운데 머물러 있다. 그렇다면 회개의 참된 의미는 무엇인가? 회개는 헬라 원어로 ‘메타노이아(metanoia)’인데, 여기서 ‘메타’는 ‘바꾼다’는 뜻이며, ‘노이아’는 마음을 의미한다. 즉, ‘마음의 교체’가 회개인 것이다.

 

 
“신약성경에서 회개를 의미하는 단어군들은 주로 ‘누군가의 마음을 변화시키다’와 ‘마음의 변화’를 의미하는 메타노에오와 메타노이아에서 유래했다.”(브니엘 성경 연구소, 원어사전)

“명사 메타노이아는 가장 먼저 '마음의 변화'를 의미한다. 이는 감정, 의지, 사상에 영향을 줄 수 있다.”(로버트 레이몬드, 최신조직신학, 제19장)
 
“회개란 죄와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모든 위대한 일에 대해서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이런 방향 전환이 있다면 참다운 회개의 본질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찰스 스펄전, All of Grace, Chapter 9)

사실 마음의 변화는 모든 것의 변화의 시작이다. 신앙과 삶은 마음에서 결정되기에 마음의 변화가 있어야 그 모든 것들도 변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어떤 마음에서 어떤 마음으로 교체가 되어야 하며 어떻게 그 변화가 이루어질 수 있는가?’이다. 

사단의 마음에서 예수님의 마음으로

“너 하늘아 이 일을 인하여 놀랄지어다. 심히 떨지어다. 두려워할지어다.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렘 2:12~13)

하나님은 위와 같이 당신을 떠난 인간이 두 가지 악을 행했다고 지적하셨다. 하나는 생수의 근원되는 하나님을 버린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이라고 한다. 이는 동시에 일어나는 일로 하나님을 버리는 것은 스스로 무엇인가를 행할 때이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사 14:12)

이사야 14장에는 온 우주에서 처음으로 하나님을 대적하여 악의 세력이 된 사단에 대해 언급하는데, 원래 이름은 계명성(루시퍼, Lucifer)이었다. 계명성은 샛별을 의미하는 금성(金星)으로 태양계에서 가장 밝은 별인데, 영어 이름인 루시퍼는 라틴어의 ‘빛(lux)을 가져오는(ferre)’ 것에서 유래되었다. 즉, 스스로 빛을 내는 존재가 아닌, 빛이신 하나님으로 인해 빛나는 샛별이 된 것이다. 이는 루시퍼가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피조물(被造物)은 말 그대로 ‘창조주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를 의미한다. 창조주는 모든 것을 스스로 할 수 있는 존재이지만, 피조물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 오직 창조주 하나님에 의해서 존재되고 변화되며 행할 수 있다. 그런데 루시퍼가 이 사실을 거부하고 피조물의 위치에서 떠나 창조주와 비기고자 했다.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사 14:13~14)

다시 말해 루시퍼는 피조물이면서도 스스로 자신의 위치를 높이려고 한 것이다. 이는 창조주 하나님을 무시하고 대적하는, 피조물로서는 가장 큰 악인 것이다. 물론, 루시퍼의 시도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창조주의 허락 없이는 그 어떤 변화도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되어 “네가 음부 곧 구덩이의 맨 밑에 빠치우리로다.”(계 14:15)라는 말씀처럼, 가장 밑바닥으로 떨어졌다. 여기서 주목해야 될 부분은 루시퍼를 타락시킨 마음이다. 루시퍼는 피조물이면서도 ‘스스로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마음을 품었다. 그 마음 하나가 창조주 하나님을 대적하게 했고, 결국은 하나님을 떠나 타락케 했다.

 
또한, 불행하게도 첫 사람 아담과 하와 역시 그 마음을 받아들였다. 창세기 3장에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으면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는 뱀의 말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 결과 아담과 하와를 비롯한 모든 인간들은 자신이 자기 삶의 주인이 되어 살아간다. 즉, 피조물이면서도 창조주 하나님의 위치에 서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스스로 할 수 있다는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인간들을 향해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다가 죽은 자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라.”
(전 9:3)고 하셨고,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창 6:5)이라고 지적하셨다. 그리고 그 마음이 비워진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마 5:3)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비워진 우리 마음에 새 마음이 임하기를 원하신다. 그것은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라는 말씀처럼, 그리스도 예수님의 마음이다. 예수님의 마음은 사단의 마음과는 정반대이다.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요 5:19)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요 5:30)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요 5:44)
“내가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아니하고”(요 8:28)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요 14:10)

위와 같이 예수님은 일관되게 자신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되어지는 것임을 강조하셨다. 즉, 모든 것의 주체를 하나님께 두신 것이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우리 스스로 할 수 있다’는 사단의 마음에서 ‘우리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마음으로 근본적으로 바뀌는 회개가 일어나기를 원하신다. 물론, 이러한 회개 역시 우리로 말미암아서는 결코 가능하지 않다. 우리 스스로 사단의 마음을 버리고 하나님의 마음을 가질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아래와 같이 회개의 주체이신 하나님에 대해 주지시키고 있다.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행 11:18)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롬 2:4)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딤후 2;25)

하지만 한국 교회 안에는 이러한 참된 회개를 찾아보기 어렵다. 이는 인간이 무언가 할 수 있다는 사단의 마음에 사로잡혀 회개조차 인간으로 말미암아 행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의미와 주체가 다른 한국 교회의 회개

최근 교회성장연구소에서 한국 교회의 대표적인 목회자 8명의 설교를 묶어 편찬한 <내 영혼의 멘토들>에서 가장 먼저 소개된 한 목사의 설교를 보면 한국 교회의 회개에 대한 가르침이 어떤지를 잘 알 수 있다.

“나는 성격이 급한 편이어서 때론 화도 쉽게 내곤 했다. 그런데 그곳에서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의 성품을 경험하게 되면서 평생 화를 내지 않고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내가 화를 거의 내게 되지 않기까지는 10년의 세월이 걸렸다. 하지만 그 후로도 몇 년에 한 번은 큰 소리를 내는 것을 보면서 늘 자신의 부족함에 대해 회개하고 있다. 내가 훈련한 오래 참음의 열매는 스스로 감정을 컨트롤할 때 길러지는 것이다.”

위의 설교 속에 나타난 회개는, 자신이 자기의 잘못되고 그릇된 성품과 행위를 바꾸는 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또한, 2007년에 한국설교학회와 글로벌리서치가 한국 교회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가장 본받고 싶은 한국 설교가’ 중 다섯 번째로 선출된 김 모 목사 역시 회개를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다.  

“회개가 무엇입니까?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이 회개입니다. 도적질하던 사람이 도적질 안하고 열심히 노력해서 정상적으로 살아가는 것, 제 위치로 돌아오는 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즉, 한국 교회를 대표하는 목회자들 대부분이 회개를 행위적인 변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인간의 노력으로 회개가 이루어짐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마음의 교체가 회개이고, 회개의 주체가 하나님이심을 가르친 정통 복음주의의 회개와는 근본적으로 길이 다르다.

 
“구원에 이르는 마음의 변화는 성령의 사역이다. 주님이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회개하고 믿을 수 없다.”(찰스 스펄전, All of Grace, Chapter 11)

“회개는 인간의 능력 이상의 일입니다. 자신의 힘으로 회개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조셉 얼라인, An Alarm to the Unconverted, Chapter 2)

“회개는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딤후 2:25)라는 말씀처럼 회개가 어디서 오는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마틴 로이드 존스, God the Holy Spirit, Chapter 13) 


변질된 회개 기도의 심각성

특히, 더 심각한 것은 서두에 소개한 옥 목사와 중앙일보 백 기자와의 인터뷰를 통해 알 수 있듯이, 회개가 죄 용서를 구하는 방법으로 변질된 것이다.

“교회에서 ‘주님, 시어머니를 미워하는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라며 눈물을 흘리고 돌아가면 시어머니를 사랑해야 맞다. 그런데 변함없이 미워하고 있다. 이런 형식적인 회개가 쌓이고, 쌓이고, 쌓여서 ‘위선’이 된다.”(옥 모 목사, 중앙일보, 2007.7.12) 

그렇기에 오늘날 대부분의 교인들은 죄를 짓고 난 후 그 죄에 대해 용서를 구하는 것으로 회개를 잘못 인식하고 있다. 사실 성경에서 죄에 대한 용서는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 9:22)는 말씀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만이 가능하다. 즉, 회개 기도를 아무리 열심히 해도 실제로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그래서 기독교 사이트들을 살펴보면, ‘날마다 회개 기도하는데 왜 죄가 씻어지지 않는가?’라는 회의 섞인 질문이 많이 올라온다. 이러한 회개 기도에 대해 미국의 복음주의 작가인 스티브 맥베이(Steve Mcvey) 박사는 그의 저서 <교회에서 듣는 52가지 거짓말>에서 아래와 같이 언급했다.

“죄를 용서해달라고 매일 혹은 자주 구해야 된다는 가르침은 너무 뿌리 깊이 박혀서 교인들에게 진실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 여기에 의문을 제기하면 정신 나간 이단으로 본다. 그만큼 죄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현대 교회가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은 이와 다르다.”(스티브 맥베이, 52 Lies Heard in Church Every Sunday, Lie#15)

스티브 맥베이는 회개 기도가 성경적이지 않는 이유에 대해 ‘구약 제물은 죄를 영구적으로 사할 수 없었지만, 예수님은 우리를 완전히 죄에서 해방시켜 주셨다’고 진술한 후, 그런데도 용서를 구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완전한 속죄를 받아들이지 않아서이며, 주기도문과 요한일서 1장 9절을 잘못 이해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또한, 찰스 스펄전으로부터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은 정통 복음주의 전도자 오스왈드 챔버스(Oswald Chambers)도 그의 저서에서 용서를 구하는 회개 기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우리가 죄에 대해 회개했다는 사실 때문에 죄 사함을 받았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하나님의 아들의 피를 발로 짓밟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영원토록 그 죄악을 기억하지 않으시는 유일한 이유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때문입니다.”(오스왈드 챔버스, My Utmost for His Highest, December 7th)

정통 복음주의의 회개의 핵심

앞서 언급했듯이 회개는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다.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겔 36:26)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이 우리 속에 있는 사단의 마음을 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주셔야 회개가 가능하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누구에게 회개의 선물을 주시는가? 박옥수 목사는 베드로와 가룟 유다의 회개를 통해 회개의 은혜를 입는 사람의 마음의 위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베드로가 ‘주님이 내가 주님을 부인한다고 하셨는데, 내가 부정했지만 결국 주를 부인했구나!’ 하고, 자기 자신을 믿었던 것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깨달았습니다. ‘나는 믿을 인간이 못 되는구나! 예수님을 부인한 죄도 죄지만, 나라는 인간이 이런 인간이구나. 나는 이렇게 악하고 추한 인간이구나. 나는 주를 부인할 수밖에 없구나!’ 베드로에게 자기를 믿는 마음이 다 무너진 것입니다. 자기를 믿는 마음이 무너지니까 베드로 속에 예수님이 임하십니다.”(박옥수 목사, 회개와 믿음, p.65)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먹은 것은 뉘우쳤지만 자기 자신을 뉘우치지는 않았습니다. 가룟 유다가 다시는 예수님을 팔지 않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는 여전히 자기를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너무 괴로워서 자살해 버렸습니다. 가룟 유다가 왜 자살했습니까? 자기 결정을 따라 자살한 것은 여전히 자기가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목매어 자살한 것은 자기 결정을 따른 것이고 자기 자신을 믿은 것입니다.”(박옥수 목사, 회개와 믿음, p.67)
 
오스왈드 챔버스 역시 자신이 철저히 무너진 사람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회개의 은혜가 임한다고 설파했다.

“나의 모든 것이 완전히 끝나서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바로 거기서 일하기 시작하십니다. 회개란 죄에 대한 감각뿐 아니라 자신에 대한 철저한 무가치함을 느끼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회개할 때 내게는 철저하게 아무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당신이 끝나는 곳, 그러나 주님께서 모든 것을 다 행하시는 곳으로 나아가십시오.”(오스왈드 챔버스, My Utmost for His Highest, August 22nd)

“천국에 들어가는 관문에는 자신이 선하다는 의식을 무너뜨리는 뼈아픈 회개의 과정이 있습니다. 이는 죄에 대한 성령의 책망의 역사로서 성령은 그 회개한 마음 속에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을 형성하기 시작하십니다.”(오스왈드 챔버스, My Utmost for His Highest, December 7th)

 
또한, 찰스 스펄전과 마틴 로이드 존스는 진정으로 회개된 자는, 자신을 옳게 여기고 자신을 높이고자 하며 자신 스스로가 무언가를 잘 행하려는  ‘인간의 본성’을 악하게 여기고 미워하게 됨을 아래와 같이 진술했다. 

“회개란 마음의 변화를 의미한다. 단순한 변화가 아닌, 성령의 조명에 의해 마음 속에서 이루어지는 사고의 완벽한 변화이다. 특히, 인간의 죄악된 본성을 발견하고 이를 미워하는 것으로, 이 죄악을 발견하고 미워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정한 회개라 할 수 없다.”(찰스 스펄전, Faith and Repentance, p.170)

 

“회개의 변화는 자신이 무가치하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바울은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 아노니’라고 고백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깨달은 적이 있습니까? 위대한 성도일수록 그 사실을 더 깊이 알고 있습니다. 회개는 자기 혐오, 즉 자신의 죄된 본성에 대한 미움을 포함합니다. 우리는 과연 자신을 미워합니까?”(마틴 로이드 존스, God the Holy Spirit, Chapter 13)

특히, 박옥수 목사는 참된 회개가 이루어지면, 피조물의 위치에서 떠나 자신이 무언가를 잘 하려고 했던 데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기 본연의 위치에 머물게 되기에 우리는 손을 놓고 쉬게 되고, 대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모든 일을 하시기에 우리 자신과 우리 인생이 달라질 수밖에 없음을 아래와 같이 자주 역설한다.  

“참된 회개가 이루어지면 그때부터 여러분은 손을 놓고 하나님이 여러분 인생에 일을 시작하십니다. 하나님이 여러분 인생에 일을 시작하시면 여러분이 달라지고 새로워지고 능력 있는 사람으로 변합니다.”(박옥수 목사, 회개와 믿음, p.141)

사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 3:20)는 말씀처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피조물인 우리가 죽고 창조주 하나님만이 살아서 일하신다면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그래서 사도 바울도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고 하며 끊임없이 자신이 죽은 존재와 다름 없는 피조물임을 잊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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