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팔 단기선교사 상훈이의 시골 전도 기행(사진추가)
네팔 단기선교사 상훈이의 시골 전도 기행(사진추가)
  • 최상훈
  • 승인 2006.03.12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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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갑습니다. 네팔 단기선교사 5기 최상훈입니다. 정말 한국에 있으면 내 계획대로 살
사람이고 나의 마음데로 살 저인데.. 하나님께서 이곳 네팔로 보내주셔서 제 마음이 변하고 제 삶이 변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곳에 와서 제가 시골전도 여행다녀 왔는데요
잠시나마.... 소식을 전하려고 합니다.

전도여행 1편.... 시골로 가다...

네팔이라는 나라를 조금 소개하자면..힌두의 왕국이라고 불릴 만큼 네팔사람 거의 전체가 힌두를 믿고 있고 석가모니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며 세계에서 최고로 높은 산 에베레스트 산이 있는 곳이 여기 네팔이다. 그리고 히말라야 산맥과 등반하기에 어렵다고 소문난 K2산도 여기에 있다. 이런 이야기를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인도사람들 조차도 자기들의 종이라고 생각하는 네팔 사람들. 세계에서 2번째로 물이 많이 나오지만 인도로 물을 보내기에 물이 부족한 나라이고 세계에서 먼지가 제일 많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먼지가 많은 나라 바로 이곳 네팔입니다.. 세계에 몇 나라 안 되는 왕 체계의 나라이며 지금은 동생이 왕인 형과 그의 가족들을 다 죽이고 왕의된 나라이다.
차가 다니는 곳이라면 곳곳마다 검문검색을 하고 나라 자체가 안정을 되찾지 못하고 도심이든 시골이든 아직도 간간이 내전이 있는 이곳.. 네팔 정부와 그들의 반대에선 반군 조직이 있고 정부가 2개로 나누워진 나라 네팔이다. 더 많이 이야기를 할 수 있지만…아무튼 여기서 나의 네팔 시골전도여행이 시작된다.

2006년 2월 27일 월요일 시골로 가다.

내가 네팔에 도착한지 10일째를 맞이하는 이날…….
아직 네팔에 대하여 아는 것도 아무 말도 통하지 않지만, 새벽부터 짐을 들고 시골전도 여행길에 나섰다… 한편생각으로는 벌써 전도 여행가는 것이 이르다 싶지만…분명히 하나님께서 일하실 일이 있다고 생각되기에 목사님을 따라 시골전도여행을 떠났다.
목사님, 현지 네팔 선교학생인 시바형제님, 나, 이레. 이렇게 4명이 잠을 깨우며 새벽거리를 나서는데..조금은 설레고 조금은 부담스러운 마음을 이끌고 나갔다.
여기 네팔 수도인 카트만두에서는 차가 많이 다니는데, 한국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그런 구닥다리 차들… 일반버스를 여기서는 사자 버스라고 불리는데,

그 차를 타고 4시간 정도 타고 가는데 중간 중간 마다 검문소에서 사람들이 내려 일일이 수색하고 짐도 수색하였다. 한국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일이지만, 여기서는 사람들이 당연히 여기고 거기에 불평하는 사람들도 없었다. 우리는 다행이 외국인이라서 그런 검문검색을 피할 수 있었다. 그렇게 몇 번이나 했을까 띨슐리 둥개라는 곳에 도착을 하였다. 거기서 허기진 배를 채우고자 식당에 들어서서 밥을 먹는데 거기 사람들은 떨가리, 달, 그리고 밥 이것이 다~이다. 현지 주민들이 있었는데, 손으로 먹는 것이 참으로 신기하고 어떻게 그렇게 먹나 싶지만.. 우리는 숟가락과 포크를 준비해서 그것으로 먹었다.^^*
여전에 목사님이 찾아가서 이야기가 된 교회가 있는데, 거기에 들렀다. 교회에 사람들도 많고 시끌벅적했는데.. 그 이유인즉.. 성경공부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이 못사는 나라에도 다단계가 들어와 교회에 사무실을 차려서 그것을 운영하고 다단계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참으로 충격적인 일이었다. 한국에는 몇 년 전에 행하여 졌던게 여긴 이제 막 들어 와서 사람들을 이끌고 시작하고 있으니.. 그것을 보는데 한국에 구원파 교회가 생각났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구원파 교회도 그런 다단계를 하다가 망한 걸로 알고 있는데, 이교회도 망하겠다는 마음이 들어왔다. 목사 되는 분이 말씀을 전하는 게 아니라.. 비즈니스로 다단계를 한다는 게 이해가 안됐다. 이미 그들은 마음을 뺏겼기 때문에 더 이상의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버스를 타고 시바 형제님의 집으로 향하는데 하루에 한 대있는 버스라서 그런지 사람들이 엄청 많았다. 서서 3시간 정도를 가는데 너무 힘들었다. 신기한 것은 버스가 산에 올라가는 것이 아닌가! 좁고 비포장도로에 먼지도 많고 강도 있는데.. 그것을 넘어왔다. 그것을 안 타본 사람들은 절대 이해 불가하며 생명의 위협까지 느껴질 만큼 위험했다. 엄청난 먼지를 마시고 도착을 했는데.. 시바형제님의 아들 썬토스가 우리를 반겨주었다. 우리가 외국인이라서 그런지 아이들이 모여들고 신기하듯 쳐다보았다. 산에 마을을 이루어 사람들이 살아가는데 아무도 운동화를 신은 사람이 없었다. 맨발이 아님 슬리퍼를 신고 다니는 듯 했다. 내 신발도 신기하게 생겨서 그런지 얼굴 한번보고 신발 한번보고 그렇게 쳐다보았다. 여기 동네 이름은 비꼬리 띤 사또밧때 동네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바 형제님의 딸 썬기따를 만났다. 우릴 보고 거리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반갑게 맞아주고 무엇이든 챙겨 주려고 하였다. 저녁에 우리가 예배를 갖기 위해서 동네 집을 찾아다니면서 우리가 여기에 오게 된 이유나, 오늘 모임이 있다는 걸 알렸다. 네팔사람들은 약속을 하여도 그 약속의 중요성을 모르기에 다들 너무 기대는 갖지 말라고.. 너만 기대해봤자 너만 상처 받는다고 그런 말을 했었다. 모임시간이 되어서 우리끼리 모임을 갖고 있는데.. 그런데 1시간이 지나 서지만 네팔 사람들이 오게 되고, 함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네팔사람들이 우리와 생각도 생김새도 그리고 못살기도 하지만 한국처럼 정도 있고 한국의 완전 시골 마을과 흡사해서 너무 포근한 느낌을 받았다. 정말 외형적으로는 집이며 옷이며 신발이며 모든 것이 한국에 비해 보잘것없지만 사람들의 친절함과 우리를 보려고 모여드는 사람들이 너무 좋고 고마웠다. 예배를 마치고 목사님께서 별을 보라고 해서 나갔는데, 정말 별이 얼마나 많은지.. 진짜 하늘에 뿌려 놓은 듯 했다. 우리가 각 나라에 630여명이 선교를 나가게 되었는데, 꼭 그것을 보는듯했다. 금방이라도 쏟아질듯했고 한국에서는 그렇게 많은 별을 절대 볼 수 없을 것이다. 너무 예뻐서 디카에 담아 놓으려고 했지만, 아쉽게도 안 찍혔다. 눈 덮인 산이며 산꼭대기의 집이며 그러면서 학교가 있고 약국, 옷가게 산꼭대기에 모든 것이 있어서 너무 신기할 뿐이었다. 네팔에 온지… 며칠 되지 않았지만 네팔만의 그 순수함이 너무 좋다.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순수함이.....늦었지만 자매님이 저녁을 주셔서 먹었는데.. 거기에 우유가 나왔다. 우리 한국은 살균 소독된 우유를 먹지만 여기서 처음으로 소가 아닌 버팔로 젓을 바로 짜서 그 우유를 먹었는데, 너무 맛있었다. 내일이 정말 기다려진다...
내일은 어떤 길로 우리를 인도해 주실 것에 대하여..

전도여행 2편 2월의 마지막 날…….
2006년 2월 28일 화요일

2월의 마지막 날이다…새벽부터 일어나서 대충 씻고 아침을 먹기위해 우리가 갖고 온 빵 몇 조각과 자매님이 주시는 지야차 를 마시고 산으로 올랐다. 한국 사람들은 아침에 밥을 먹지만 여기 네팔사람들은 아침에 ‘지야’라는 전통 차 한잔이 아침의 전부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산은 한라산이며 2000미터가 되지 않는다고 한다. 시바형제님 가족 살고계시는 곳이 2,500미터가 되는 곳에 계시는데 거기서 우리가 1000미터 더 올라 가야한다고 하셨다.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나의 체력의 한계가 나타나고 산을 올라가면 갈수록 집이 나타나는데 거기서 학교를 가는 학생들과 어린이, 무거운 짐을 머리 이마에 줄을 달아 갖고 가시는 할아버지 할머니. 소 대신 버팔로를 키우고, 닭이 알을 낳아서 그게 부화 가되어 병아리도 많고 염소도 많고 정말 자연친화적인 삶을 사는 것 같았다.

진짜 한국의 예전모습과 다를 것이 없었다. 3시간정도 올라갔을까?? 산꼭대기쯤에 교회가 있는 것이 아닌가! 산꼭대기 교회에 누가 갈까 했지만 거기에 350~400명이 모인다고 한다. 집을 보면 그렇게 안 보이는데.. 그렇게 모이는 교회가 몇 군데나 더 있다고 하니까 정말 놀라웠다. 네팔 사람들은 산으로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힌두가 아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많았다. 여기서는 인사를 할 때 ‘나마스떼’라고 인사를 하는데 교회 다니는 사람은 ‘제이머시’라고 인사를 한다.
위로 올라가면 갈수록 나마스떼라는 인사는 못 듣고 제이머시 라는 인사를 많이 들었다. 그 교회 목사님과 딸 아들이 우리를 맞아 주었는데 한국으로 치면 솔직한 말로 거지꼴을 해서 지내고 있었다. 그 목사님이 점심도 챙겨주시고 지야 차도 주셨다. 목사님 이름은 벌러버하둘 따망이라고 한다. 그리고 교회가 있는 동네는 ‘룻째트’라고 하는 동네이다. 이레가 거기에 1주일 동안 머물면서 말씀전하기로 하고 3시쯤에 내려오는데 동네에 들러서 염소새끼를 안고 사진도 찍고 할아버지께서 찌우라 라는 쌀을 한포데 갖고 올라 오시길래 이야기하면서 사진도 찍었다. 여기 사람들은 쌀을 아기 업듯이 업고 줄을 이마에 대고 쌀 밑을 받치면서 물건을 든다.. 할아버지께서 하고 계시 길래. 나도 그렇게 따라 해봤는데 .얼마나 무겁던지. 10미터쯤 갔을까……. 동네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엄청 웃었다. 사진 찍는다고 보라고해서 봤는데 .웃어야 하는데.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고 10~20분정도 걸어 내려왔을까? 까훌리 동네에 도착해서 목사님이 저번에 복음을 전하셨다는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를 하는데 우리를 자기 집으로 흔케이 안내해 주며 거기서 교제가 되었다. 몸이 아파서 지금은 휠체어 신세를 지고 있다고 하며 자기 와이프도 소개시켜주고 이야기를 나누웠다. 이레랑 나랑 안 되는 영어랑 네팔 말을 ?어 가면서 이야기를 하다가 여자 2명이 들어왔는데, 딘 마야 따망과 돌마라마 였다. 크리스찬 이며 교회에 나가고 있다고 했다. 목사님께서 우리에게 기회를 주셨다. 복음전하라고.. 머뭇거리다가 내가 복음을 전하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다가 16분쯤 지나서 복음을 받아들였다. 내생에 네팔에서 처음으로 전한 복음 이였으며 하나님께서 2월 마지막 날에 나에게 큰 은혜와 선물을 주셨다.
아직도 많은 교제가 필요하지만 내가 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는 게 신기하고 기뻤다. 밤이 찾아와서 처음으로 후레쉬를 켜고 산을 내려가는데. 정말 어둡고 무서울 정도로
캄캄했다. 그래도 잘 찾아와서 저녁을 먹고 우리끼리 모임을 갖는데. 어제 왔던 학생들이 찾아와서 율동도 가르쳐주고 목사님의 말씀 듣는 시간도 갖게 되었다 그리고 마칠 때. 한국의 게임을 가르쳐주며. 같이 게임도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었다. 시바형제님의 자매님이 아직 정신이 온전치 못하는데, 매일 우리를 위해 밥도 주시고 웃어주시는데.. 정말 그분을 위해서 내가 그 무엇도 해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지만... 하나님께..기도를 하며. 지내야겠다. 내일이 또 기다려진다. 어떤 사람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
2월에 마지막 날에 하나님이 나에게 가장 큰 선물을 주셨고 그런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2006년 3월1일 수요일 리오몬따냐.....강과 산

아침에 일어나서 산을 타고 수드러선의 집을 향하여갔다.2시간정도를 가파른 산을 내려갔을까?? 시바형제님의 친척집에 들러서 밥도 얻어먹고 우유도 마시고 짧게라마 네팔어로 그 집 아저씨께 복음을 전하는 시간도 가졌었다. 아직도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어떻게 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아기가 몇 단어 안 되는 걸로 의사표현을 하듯이 나도 몇 단어 안 되는 걸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거기서 시간이 되어 다시 가파른 산을 타고 내려오는데.. 거의 2,500미터 되는 산을 다 내려왔을 때쯤에 반군인 마호이스트를 만나게 되었다. 여기 네팔에는 도시 쪽에 외국인이 많이 다니고 살지만은 시골과 산이 있는 곳에는 외국인의 모습은 찾아 볼 수도 없고 오고가고 하지 못한다고 한다. 그 이유는 반군인 마호이스트 때문이라고 한다. 네팔은 2개의 정부가 있는데 하나는 나라에서 인정한 네팔정부이고 또 하나는 그것을 반대하는 반군들의 정부이다. 마호이스트는 외국인을 통하여 세금을 받고 그렇지 않을 경우는 시골이 아닌 도시로 돌아가라고 한다. 만약에 그 말을 어기고 계속 자기들의 일을 추진할 경우 잡혀갈 수도. 아님. 목숨까지도 위협을 받는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에 외국인이 오지 못하고 온다고 하더라도 그들에게 세금을 바친다고 한다.
우리 또한 그 사람들을 만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지만.. 우리의 목숨은 하나님 손에 달려있지 그들에 손에 우리가 목숨이 오고 가는 것이 아니라서 그들을 만나서도 두려움 보다는 담대함이 있었다. 그들도 우리에게 돈을 요구하고 계속 여기 있을 경우에는 그들도 우리의 생명에 장담을 못한다고 협박을 하였다. 목사님은 그들을 꾸짖기 시작하였다.
왜 외국인들을 적으로 만드냐고. 당신들이 추구하는 평화와 정부가 이런 것이냐고…….
외국인을 친구로 삼아…이런 일에 대해서 함께 문제해결을 하려고 생각 하지 않냐고..당신들은 도둑놈이라고.. 우리가 돈을 준다고 하더라도 당신들에게 주지 못한다고..
당신 사령관을 만나서 주고.. 우리가 활동할 수 있는 증서를 받겠다고 하였다.목사님께서 좀 더 말씀 하였고 그들은 우리를 순순히 보내줬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바꿔 주신 듯 했다. 또 다시 길을 걷는데 산 밑에까지 내려가니 냇가처럼 물이 흐르고 있었고 냇가 보단 큰 강가처럼 보일만큼 큰 물길이 있었다. 우리는 그 강을 건너서 또다시 산을 타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정말 리오몬따냐 였다.. ㅋ ㅋ
산을 조금씩 조금씩 올라가는데 정말 풍경은 진짜 좋은데 내 몸이 너무 무겁고 가방도 너무 무겁고 올라가는데 너무 힘들었다. 올라가도 올라가도 계속 올라가야하고 몇 번이나 목사님 좀 쉬었다가 갑시다!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때그때마다 주님께서 인도하셔서
조금 지나니까 또 다른 힘이 생기고 생겨서 산을 몇 개를 넘어서 마침내 수드러선 형제님 집에 도착하였다. 얼굴은 빨갛게 익었고 땀은 비 오듯이 오고 한국식으로 말하면 참 꼬라지가말이 아니었다. 도착하자 말자 학교가 보였는데. 거기서 아이들과 이야기도 하고 사진도 찍고 하였다. 목사님께서는 150 루피를 주셔서 이레랑 같이 과자와 먹을 것을 사러 가는데.. 내리막길에 막~~뛰어 내려갔다 그런데.. 다리에 힘이 풀려서 발목이 접질린 것이 아닌가.. 순간 아팠지만 또 물건 사고 올라갈 땐 괜찮았다. 형제님 집에서 쉬는데 그 집에서 지야와 로띠.. (수수 빈대떡)을 먹는데 솔직히 그렇게 맛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손님이 왔다고 먹을 것도 차려주시니 너무 감사했다. 네팔 전도 여행 온지 3일째이지만 정말 예전의 한국모습처럼 인정이 많다 는걸 알게 되었다. 거기서 1시간 정도 있다가 또다시 길을 걸었는데.. 웬걸, 접질렸던 발목이 아파왔다. 1시간 정도 걸어가야 하는데.. 너무나 걱정이 되었다. 가다가 또 접질리고 또 접질리고 너무 아팠다. 하나님 제발 지금 가는 곳 까지만 갈 수 있도록 해주세요. 저절로 기도를 하게 되었다 아픈 다리를 이끌고 1시간 후 마데커리까 동네에 도착하고 비너이 먼들리 교회에 도착하게 되었다. 거기서 2명의 청년을 만날 수 있었는데. 두먼과 므띠만 이었다. 두먼이라는 학생은 인도에서 신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고 므띠만은 교회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학생이었다. 목사님께서는 이번에도 교제 한번 해봐 라는 말을 남기시고 어디론가 사라지셨다. 이레랑 나는 말도 안 되는 영어로 성경을 읽고 이야기 시작하였다. 영어로 말을 하면 두먼이 네팔어로 므띠만한테 통역을 해주고 이렇게 말씀을 전하기 시작하였는데.. 학생들이 구원을 받고 너무나 기뻐했다.. 솔직히 나는 한 것이 없었다..영어로 했기에.. 한국말로 했음.. 나도 말을 했을 것인데...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너무 부러웠다. 영어도 네팔어도 나보다 더 잘하기에 부러움뿐이었다. 우리는 라이쳐스맨 이라고 외치고 밖에선 우리를 위해서 밥을 준비하고 있었다. 장작불에 네팔 쌀과 달 이라는 국과 어짜르라는 네팔김치 그리고 그중에 제일 맛있는 떨가리를 먹었다. 얼마나 많이 주는지 배가 터질듯했다. 밥을 먹고 짧게라마 말씀시간을 가졌고 여기서도 건전 댄스인 라이쳐스 댄스를 추는 시간도 가졌다.
분명 우리교회와 분위기며 풍습도 달랐지만 하나님이 이들을 구원하시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시골 전도여행와서 알게 된 사실이었지만 많은 사람이 교회에 나오는걸 알 수 있었다.

힌두의 왕국이라고 하지만 주님을 찾고 부르짖는 사람이 참 많다. 산에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많다. 시골에 많은 사람이 교회에 나오고 우리의 말씀을 듣기 원한다. 네팔에 빨리 많은 선교사님들이 파송되어서 오길 오늘도 난 기도한다. 그리고 내일을 위해 내 아픈 다리도 낫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2006년 3월 2일 목요일 낮은 계급의 사람들……. 목사님과의 마지막 밤

어제 그 교회에서 자고일어나 그 교회 사람들을 와서 새벽예배를 드리고 다시 왔던 길로 돌아가게 되었다. 7시에 그쪽동네 교회에 예배를 약속하고 왔기 때문에 서둘러 가야했다.
그런데. 문제는 나의 다리인 것이다……. 쫌 나아야하는데. 걷는 것조차 너무 아팠다.
정말 병신이 되는듯했다. 목사님과 이레는 예배시간 때문에 먼저 내려가셨고 나와 시바형제님이 뒤쳐져서 내려갔다. 시바형제님이 내가 불쌍하게 보였는지 나의 가방을 들어주셨다.
나는 강한 사람 이였고 몸도 튼튼한 사람이었는데. 다리하나 온전치 못하니까 병신이 되어버렸다. 왜 내가 이런 일을 당하는가 생각도 되면서 박 목사님의 간증처럼 아프지만 나았다 간증을 따라 해봤지만 아팠다. 시바형제님께서 나무 자르고 있는 사람을 발견하시곤 나를 위해서 지팡이를 만들어오셨다. 너무 고마웠다. 말도 안통하고 그렇지만 웃음으로 모든 것이 표현되었다. 그걸 짚고 내려갔는데. 교회는 문이 잠겨있었다. 그래서 가까운 집에서 모임을 갖고 있었는데. 그 교회가 문이 잠겨있는 이유를 듣게 되었다 여기 관리 하는 사람에게 연락을 못했다는 것이다 예배당을 만들고 예전에 목사도 했던 분은 뒷전이고 지금은 다른 사람이 관리한단다. 그 다단계에 빠져있는 사람이...그런 부분에 이야기하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는데. 수드러선 집에 다시 도착하였다. 예쁘고 잘생긴 동생들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네팔의 국화도 주었다. 거기서 아침을 해결하고 난 다리가 아파서 그 집에서 자고 예배를 인도하기로 했었는데..시바형제님이 씻으러 갔을 때 다른 반군이 시바형제님을 불러 또 협박을 했다. 돈을 내어놓으라고 그렇지 않을 경우 자녀들을 죽이겠다고 그렇지 않을 거면 도시로 내려가라고 . 그런 말을 듣고 그 집에 말을 했을 땐. 더 이상 우리가 그 집에 머무를 수가 없었다. 아픈 다리를 이끌고 다시 산을 내려가는데. 또다시 강을 건너고 예전에 목사님께서 만난 아저씨를 만나게 되었다. 거기서 내 삶이 어떻게 변하게 되었는지 한국에서 어떻게 오게 되었는지 이야기를 하니까.. 그 사람이 너무 좋아했다. 그 사람도 하나님을 믿고 전도하는 부분에 우리 때문에 힘을 얻게 되었다고 기뻐했다. 이야기를 끝낸 후 다시 버스를 타고 띤슐리 둥개에 갔는데.. 거기서 나가는 버스가 끊어져서 걸어서 이동해야했다. 여기서는 5시면 버스 통금시간이 끝나는 듯 했다. 1 시간정도 걸어 내려가서 천민들만 사는 동네에 이르게 되었다. 저녁7시쯤에 되어야 도착하였는데.. 염소를 부엌에서 키우고 돼지를 개 키우듯이 풀어놓고 키웠다. 그리고 연립주택을 만들어서 이 사람들끼리 연합하면 사는 것 같았다.
교회가 2평 남짓한 공간이었고. 그곳에서 1명을 두고 교제를 시작하였는데. 나중에는 앉을 곳도 없을 만큼 많이 사람들이 와서 우리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 어떤 곳 보다 환경이며 시설이며 공간 모든 것이 열악하였지만 사람들의 마음만큼은 그 어떤 교회의 사람들 보다 순수하고 좋았다.

10시간 넘어서 예배를 마치게 되었는데. 교회인도 하는 목사 될 듯한 분이 우리를 자기 집으로 인도하였다. 집에 창문은 있어도 그걸 막을 것이 아무것도 없었고 창문밖에는 소똥을 쌓아 놓은 곳이 있었다. 한국 같았으면 정말 상상도 못 할 집이지만 우리에겐 그런 집이라도 너무 감사 했다.이렇게 못살고 생각하나 바꾸기 힘든 사람이라 할지라도 우리와 함께하고 복음 받아들인다면 이 사람들도 이 사람들의 생활도 바꾸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네팔에 정말 복음의 역사가 많이 필요하다. 네팔어 빨리 배우자 최상훈!!!!
2006년 3월3일 금요일 둘만의 시골전도 여행

목사님과 시바 형제님은 새벽에 떠났다. 목사님께서는 이레랑 나랑 다시 시골로 보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하지만 발제교회에 우리가 간다고 약속을 했기에.. 우리는 그 약속을 지키고 싶었고..이레랑 나만 있으면서 하나님을 더 보고 싶었다. 우리를 두고 떠나는 목사님의 뒷모습에. 발걸음이 무거운 것을 알 수 있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께. 우리를 맡기시고 간다는 모습으로 보였다. 목사님과 시바 형제님의 모습이 사라지자. 드디어 진짜 전도 여행이 시작되었다. 정말 걱정도 많이 되고 우리가 잘 찾아 갈 수 있을까. 잘 돌아 갈 수 있을까 이런 마음이 많이 들었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제 교회 있었던 람 허리 꾸말이라는 친구와 람씨라는 동생을 우리에게 붙여 주셔서 함께 동행하게 만드셨다. 네팔에 와서 코이카 라는 단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자기들 집 근처에 그 사람들이 만든 건물이 있다고 해서 가보았다. 넓은 잔디밭과 누가 봐도 네팔사람이 지었다고 생각 하지 못할 단층짜리 건물이고 그 옆에는 큰물줄기가 흘러내려가는 강이 있었다. 너무나 좋아보였다. 천민들이 사는 곳에 이런 건물이 있다는 것도 그렇지만. 이런 곳에 한국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더 좋았다. 하지만 그때 한국 사람들을 만날 수가 없었다. 버스 타러 가는 길에. 코이카 사람들이 일하는 사무실이 있다고 해서 물어물어 해서 찾아갈 수 있었다. 남자 한분과 여자 두 분이 있었는데. 우리가 어떻게 여기 오게 되었고. 우리가 하고 있는 일에 설명을 하니까 너무 기뻐하셨다. 또한 우리도 그렇지만 그 사람들도 이런 곳에서 한국말 하는 사람을 만나서 너무 기쁘다고 하였다. 그 사람들은 9월 달이면. 이곳을 떠난다고 한다. 이유인즉 한국에서 후임이 오지 않아서 그렇지만. 반군인 마호이스트가 내려오기에 여기도 안전하지 못한다는 이유였다. 미국은 벌써 자원봉사 하러왔던 사람들이 벌써 철수하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우리는 오늘 다시 산으로 간다고 말을 하니까. 깜짝 놀라면서. 어떻게 그런 산을 가려고 하냐고 걱정해주었다. 우린 그때. IYF 을 설명할 수 있었고. 우리가 네팔에 오게 된 이유하며 왜 다시 올라 가는 지 설명해주었다. 그러면서, 우리가 보고 온 건물에 대하여 말을 하였다. 자기들은 그 건물을 이번년도 1월 달에 준공식을 하였고 그 건물에 침대며 모든 생활품을 놓아두었다고 한다……. 하지만 한국에 더 이상 올 사람이 없어서. 그 건물과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두고 가야하는데. 우리이야기를 듣고 우리보고 맡아 줄 수 없냐고 물어 왔다. 사실 목사님께서 나에게 이곳에 교회를 지었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진짜 하나님께서…그쪽에 사람들을 사랑하시는구나. 하나님께서 그 건물을 우리에게 주시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러면서. 우리가 산에 올라가서 마호이스트 만난이야기 목사님이 그 사람들에게 했던 이야기 쭉~~이야기 해줬다. 너무 놀라고 우리를 장하다고 했다.ㅎㅎㅎ 2시에 삿또밧데가는 차가 한 대밖에 없어서. 그걸 타려고 나오며. 너무 감사했다. 하나님께. 네팔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게 너무 잘 보였다.
고물 구닥다리 차를 타고 올라가는데. 중간 중간마다.검문 검색도하고 차가 오래되어 그런지 산에 올라가다가. 계속 차가 퍼지는 것이 아닌가.……. 차가 올라가다가 그 좁은 길에 설 때 너무 섬뜩섬뜩했다.. 이러다가 뒤로 밀려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건 아닌지. 별생각이 다 들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가는 줄 아시고 사고는 나진 않았지만. 무사히 잘 도착하였다. 시바형제님 집에서 애들을 모아서 다시 모임을 갖고 한국어 공부도 가르쳤다.
너무 기뻐했다. 내일은 산에 일반교회 예배를 인도하러간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이레를 통해 일을 하실지 는 우리는 모르지만 많이 기대가 된다. 그리고 산에는 마호이스트가 많다. 그런 부분도 주님을 의지하고 맡기며 의지하여야겠다. 네팔 정말 복음이 많이 필요한 나라이다…내일 어떻게 주님이 일하실지 너무 기대가 된다.

2006년 3월4일 토요일 산꼭대기의 교회아침6시30분에 교회를 향하여 집을 떠났다. 여기 네팔에서는 토요일이 한국의 일요일과 같다. 그래서 토요일에 모든 사람들이 쉬고 교회를 간다…이레랑 나랑 썬기따 랑 저녁마다 우리 모임에 함께한 비르만과 자매님과 함께 올라갔다. 자매님이랑 애들이랑 올라갈 때 1시간 30분 만에 그 교회까지 올라갔다. 저번에 목사님과 시바 형제님이랑 갔을 땐. 4시간정도 걸린 것 같았는데. 그 교회에 가까워 오자 나랑 이레가 외국인이라서 그런지 민망할 정도로 쳐다본다. 부끄러웠다. 발제 교회 목사님과 이야기를 하고 우리 소개하는 시간이랑. 말씀전할 시간을 달라고 다시 한 번 이야기를 했다. 예배 시작을 8시 30분에 시작해서 10시에 끝난다고 했는데 10시 넘도록 우리에게 시간을 주지 않았다.

시간이 좀더 지나서야 처음 온 사람들 소개를 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여주고 나랑 이레랑은 강대상 위에 올라가서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 정말 보고 읽는 수준이었지만. 소개하면서 말씀까지 전하였다. 내가 정말 개떡같이 말을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듣는 이들의 귀를 열어주시면 이들이 내이야기를 듣고 마음으로 받겠다! 라는 마음이 있었다. 20분정도 이이야기를 하고 내려왔는데. 예배가 끝날 시간이 지났지만 끝나지 않는 것이다. 계속 계속 기도 하고 말씀 전하고 기도 하고 말씀전하고 그리고 헌금 걷는 시간도 갖으면서 이거 한국에서 들어왔다는 마음이 들었다…11시30분쯤 됐을 때…끝이 났는데. 이들이 집에 가지 않고. 줄을 만들고 손에는 꽃다발을 만들어서. 쥐고 있었다…누가 오냐고 물어봤는데. 한국 사람이 더 온다고 했다. 우리는 의아해 하며. 누가 오나 기다리고 있었다. 저 멀리서 머리가 하얗고 나이쫌 드신 아저씨가 네팔 현지 사람3명과 오고 있었다……. 그분은 한국 선교사였다.
그 사람이 오니까. 엄청난 박수소리와 꽃다발이 머리를 다 덮이도록 걸어주었고.네팔사름은 사진찍기에 바빴다. 잠시 한국선교사님과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 사람은 성결교회 소속선교사였다. 우리는 발제교회 목사와 이야기 할 때. 자기는 아무 곳에도 소속되어있지 않고 누구한테 도움을 받지 않는다고 하였다.
내가 한국 선교사님께 이교회도 성결교회 소속이냐고 물어보았더니. 성결교회 소속이란다.
우리는 더 이상 그 교회에 머물고 싶은 마음이 없어졌다. 우리는 1주일간 그 교회에 머물고 있으면서 그 사람과 이야기 나누고 싶었지만. 우리 마음이 너무 불편해서 내려오기로 했다. 같이 간 사람들을 이끌고 내려오는데. 그쪽사람들이 말씀전한다고 오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무슨 말씀을 어떻게 전하나 보자 해서 올라가서 듣는데…한국에서 온 선교사는 캠코더. 디카. 필름카메라로 사진 찍기 바빴고. 정작 말씀은 네팔 현지 사람이 전하였다.
우리는 맨 뒤에 의자에 앉아서 무슨 말 하는가 싶어서 듣고 있는데.

옆에 비르만과 다른 청년이 옆에 앉아있었다. 오늘 낮에 내가 한 말씀 기억나니?? 그 청년은 말씀은 들었지만……. 내가 복음을 전한 것에 이해를 못했었다.. 다시 그 학생과 낮에 전하였던 말씀을 차근차근 천천히 전하였는데… 옆에 있던 비르만과 그 학생이 구원을 받았다. 그 학생이 내 이름을 물어보고 가르쳐 줬는데. 난 간다는 생각에 나가려고 하니까. 그 학생도 자기 이름을 가르쳐 주었다. 군바 하둘따망이라고.. 네팔 말이 짧고 못하지만. 하나님께서 도우시면 듣는 귀도 열어주시고 말하는 나의 입도 주님께서 열어 주신다는 걸 보게 되고 또 한 번의 주님께서 하시는 일을 보게 되었다. 짧지만 그의 마음을 주님이 열어주시고 복음을 받게 하여 주셔서 너무 감사했다. 그 집에 내려오자 말자 나는 시체가 되고 말았다

2006년 3월5일 일요일 교회 도착하다.

아침에 일어나서 정신을 챙기고 짐을 챙겨서 내려갈 준비를 하였다. 씻으려니까 오늘
물이 나오질 않았다. 부스스하게 해서 버스를 타려고 내려가니까. 시바 형제님 가족이
너무 아쉬워 하셨다. 썬기따는 학교에 갔다가 차오는 소리를 듣고 수업도중에 나와서 우리 가는 모습을 보고 갔다…거기에 있는 동안...자매님을 엄마라고 부르고 동생들이 친 오빠 친형처럼 따라와 주었다. 나도 떠나는 마음이 너무 무거웠다. 말도 잘 안통하고 생김새도 다르지만 서로 서로 마음이 열리고 통하니까 무엇이든 다·~ 통하였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3시간을 버스를 타고 띨슐리 둥개 마을에 도착하였다. 1시에 우리 교회 쪽 가는 버스가 있었어. 3시간 정도 남았는데. 코이카 사무실로 찾아가게 되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때마침 문이 닫혀있었다… 20분정도 걸어서 버스타는 곳 근처에서 짜우민 이라는 라면 면발에…야채를 넣고 볶은걸 먹게 되었다....처음 먹는 거라.. 조심히 먹었는데. 먹다보니 먹을 만하였다. 1시 버스를 타고 4시간정도 내려오는데. 먼지도 많이 들어오지만. 엉덩이가 너무 아팠다…그렇게 오다보니까. 드디어 수도인 카트만두 겅거부에 도착하게 되었다. 너무 낮 설었다. 시골에만 있다가 오니까 차도 많고 사람들도 많고 그나마 맑은 공기를 마셨는데, 시내에 도착하니. 엄청난 먼지였다. 여기는 그레이스 같은 차가 많이 있는데. 이것이 마이크로버스이다…이걸 타고 우리교회가 있는 사마쿠시촉에 도착하였다.
얼마나 마음이 기쁘고 좋은지 저녁에 사모님이 해주시는 한국음식을 먹는다는 게 또 우리를 반겨줄 교회가 있다는 게 너무 좋았다. 교회 문을 열고 들어가자 말자 이산가족 상봉하는 것처럼. 준혁이형과 목사님 아들 시은이 그리고 선교학교 학생인 수드러선과 달려와 안고 기뻐했다. 와~ 이곳이 우리 집이구나. 이런 마음이 들었다. 저녁에 밥을 먹고…시은이가 우리를 위해 과자 파티를 열어주었다. 그러면서 우리가 다녀온 이야기 목사님의 말씀을 듣게 되었다 네팔사람을 섬겨야 한다고 네팔 사람이 아무리 못살고 더럽고 하지만 우리가 이 사람들의 마음을 얻지 못한 다면 이곳에서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이며 우리가 어떻게 선교를 하겠냐고 이런 말씀을 들으면서 네팔사람들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 하는 시간이 되었다.
네팔사람 한명이 교회에 세워진다는 게 참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안 된다는 것도 하나님께서 네팔에 목사님을 통하여 계획하신일이 많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번 주 카트만두에서 생활이 너무 기대가 된다. 짧다면 짧고 길 다면 긴 6박7일 기간의 전도여행에서 하나님께서 분명이 일하시는 것도 보게 되고 주님의 계획안에 하나하나 이루어 진다는 걸 볼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6박7일 동안 우리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여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전도 여행 다녀온 후…….

하나님은 우리의 지도자이시오 성경은 나의 삶의 지도이며 나침반이요 내가 어느 곳에
가든지 복음의 말씀만 있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으 리요 아무리 어두운 곳에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지으신 별과 달이 우리의 길을 밝혀 주실 것이요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일이 찾아온다 하여도 주님은 항상 나와 함께 하리로다
내가 성경을 안다는 것은 성경에 있는 복을 내가 받은 것이요내가 성경을 받아들인 다는 것은 나의 삶의 지도이며 나침반이니 나의 길을 인도하시리라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07-06-13 20:23:14 게시판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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