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 수기_1회
선교사 수기를 시작하며
며칠 전, <월간 기쁜소식> 편집장으로부터 ‘2025년 1월호부터 1년간 연재할 선교사 수기를 써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연락을 받고 40년 넘게 교회 안에서 살아온, 그리고 18년 넘게 아프리카에서 선교하고 있는 내 삶을 돌아보았다. 자리에 앉아 ‘어떻게 나의 지난 삶을 12회로 나누어 수기로 써 갈까?’ 생각하며 내가 겪은 일들과 간증들을 종이에 적어 보았다. 그러다 보니 그때마다 나를 도우시고 역사하셨던 하나님이 다시 내 마음에 떠올랐다.
내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 한 가지는 교회와 하나님 종의 인도였다. 특히 박옥수 목사님의 인도가 나를 변화시켰다. 지금 내가 아프리카에서 선교사로 사역하는 것도 박 목사님의 사랑과 인도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에는 목사님의 마음을 다 알 수 없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목사님이 나를 특별하게 이끌어주셨다는 마음이 든다. 목사님은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복음을 전해 오셨고, 나는 큰 은혜를 입어 그런 목사님께 인도를 받아 지금까지 복음 안에서 살아왔다. 이번 호 선교사 수기에서는 내가 어릴 때부터 목사님께 인도를 받은 간증, 그리고 하나님께 받은 마음으로 나를 품어 주신 하나님의 종의 사랑에 대해 소개하고 싶다.
기도의 끝은 늘 ‘하나님, 한국에 가고 싶어요’였다
내가 태어났을 때 부모님이 기쁜소식선교회 안에서 목회를 하고 계셔서 나도 자연스럽게 교회 안에서 자랐다. 어렸을 때에는 교회 안에서 나고 자라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도 모르고 살았다. 그렇게 교회 안에서 부족함 없이 목회자 자녀로 살면서 자연스럽게 예배를 드리고 기도도 하고 성경도 읽으며 성장해 갔다. 내가 일곱 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가 미국 선교사로 파송을 받으셔서, 나도 미국으로 가서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를 다니며 영어도 배울 수 있었다. 그렇게 교회 안에서 자라면서, 하나님의 은혜로 복음을 듣고 구원받은 것 외에 특별한 믿음 없이 사는 생활이 이어졌다. 내가 열다섯 살이 되던 해까지 말이다.
그렇게 지내다가 내 삶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어느 날, 부모님이 사역하는 데에 문제가 있어서 신앙 연수를 받기 위해 한국으로 들어가셨다. 우리 가족이 살고 있던 필라델피아 교회에는 다른 선교사님이 오셨다. 부모님이 한국으로 들어가시고 형과 나는 학교 때문에 미국에 남았다. 얼마 되지 않아 형이 집을 나가고, 또 함께 예배당에서 생활하던 다른 형도 교회를 나가면서 나 홀로 교회 안에 남게 되었다. 교회 모임이 끝나고 선교사님 가족이 예배당 옆에 있는 사택으로 가시고, 형제 자매님들도 돌아가시고 나면, 나는 예배당 문단속을 하고 혼자 어두운 예배당 한쪽 방에 남아 있었다. 그럴 때면 나는 어린 마음에 서럽기도 하고, 한편으론 두렵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 어린 나이에 공허함까지 느껴졌다. ‘무엇을 위해, 언제까지, 어떻게 살아야 하지?’ 이런 마음을 달래기 위해 한번씩 혼자 예배당 바닥에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한 번 두 번 기도하다 보니 매일 기도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할지 몰라 그냥 “하나님, 저를 지켜주세요. 제 삶을 인도해 주세요.” 하면서 기도했는데, 기도가 끝날 무렵이면 나도 모르게 늘 한국에 가고 싶다는 기도를 하고 있었다. 어린 나이에 부모님도 곁에 안 계시고 가족도 없이 혼자 지내다 보니, 한국에 가는 것이 마음에 유일한 바람으로 자리 잡았다.
내게 손을 내밀어 주신 박 목사님
그렇게 몇 달이 지나 1998년 11월, 박옥수 목사님이 뉴욕 교회 집회 강사로 오셨다. 뉴욕에서 차로 2시간 정도 떨어진 필라델피아 교회에 있던 나는 집회에 참석하러 뉴욕 교회로 갔다. 집회에 참석하던 중 하루는 오후에 박 목사님께서 나를 부르신다고 해서 목사님이 계시던 방으로 들어갔다. 어려서부터 교회 안에 살아서 그런지 큰아버지 같았고 늘 웃으며 반겨주셨던 목사님이었지만, 그날은 좀 심각한 얼굴로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나는 목사님 앞에 가서 앉았다. 목사님이 이야기를 시작하셨다.
“성경아, 한국에 나와 계신 너희 부모님은 미국에 사역하러 다시 나오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그리고 네 형도 집을 나갔다고 들었다. 너희 가족은 왜 이렇게 교회를 어렵게 하고, 내 말을 듣지 않는지 모르겠구나.”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목사님이 하시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때 내 나이가 지금 우리 큰딸과 비슷한 열여섯 살인 걸 생각하면, ‘목사님은 어린 나에게 어떻게 그런 이야기를 하실 수 있었을까?’ 싶은 생각이 들 만큼 냉정하셨다.
“내가 볼 때 너희 가족은 교회를 어렵게 해. 그래서 너도 교회 안에 있는 것이 유익하지 않아. 교회 밖에 따로 방을 얻어줄 테니 교회에서 나가서 혼자 살아. 밥도 혼자 해먹고, 아르바이트를 해서 돈을 벌어 학교에 다니고.”
목사님 말씀을 듣던 나는 순간 너무 당황스러웠고, 마음이 무너져내렸다. 혼자 살아갈 생각을 해보니 모든 것이 너무 막막해 보였다. 목사님은 이야기를 이어나가셨다.
“내가 너를 다른 교회로 보내서 다른 목사님 밑에 있게 하려고도 생각했는데, 어느 누구도 널 받아줄 사람이 없어.”
어린 내 마음에 어떤 길도, 소망도 보이지 않았다. 정말 버림받은 것처럼 느껴졌다. 정적이 흐르고, 잠시 후 목사님께서 입을 여셨다.
“다른 사람은 다 널 버려도 나는 너를 받아줄 수 있어. 네가 나랑 같이 한국으로 가겠다면 나는 너를 받아줄 수 있어. 너, 어떻게 할래?”
앞이 캄캄하고 기댈 곳 없는 형편 앞에서, 철없고 어린 내 마음에서는 목사님을 따라가는 것이 유일한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대답했다.
“목사님! 저, 목사님 따라 한국 가고 싶습니다. 사실, 저도 한국에 가고 싶어서 기도했어요. 왜 그렇게 기도했는지 모르지만, 저 목사님 따라 한국에 가고 싶어요.”
내 대답을 듣는 순간 목사님 얼굴이 밝아지셨다. 목사님은 미소를 띠고 말씀하셨다.
“그래, 내가 너희 부모님하고 상의해서 네가 한국 나오는 편을 알아보고 연락을 줄게. 나랑 같이 한국 가자.”
그것이 나와 목사님의 첫 연결이었다. 어려서 잘은 모르지만 ‘하나님이 박 목사님을 통해서 나를 인도하시는구나. 목사님은 하나님이 내게 보내주신 분이야’라는 생각이 들었고, 내게 유일하게 손을 내밀어 주신 분이 목사님이셨다. 그렇게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이 정해졌고, 한국으로 떠나기 며칠 전에 형이 돌아왔다. 우리는 같이 한국으로 들어왔다.
네가 살고 싶은 삶 말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 봐
1999년 1월 7일, 한국에 도착해 당시 박 목사님이 시무하고 계시던 대전에 있는 한밭중앙교회로 갔다. 그해 3월에 나는 대전에 있는 어느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몇 달이 지나 아버지는 다시 국내에서 사역을 하시게 되었고, 나도 아버지가 사역하시던 광주로 내려가 고등학교를 다녔다. 내가 고등학교 3학년이 되던 해에 아버지는 다시 사역지를 옮기셨고, 얼마 되지 않아 사역을 그만두셔야 했다. 형도 대학에 들어갔지만 다시 교회와 멀어졌다.
내가 대학 진학을 앞둔 겨울방학 기간에 대학생 수련회가 열렸다. 나도 수련회에 참석했다. 수련회 첫날, 박 목사님이 교사 모임에 들어오셔서 갑자기 “김성경, 몇 반이야?”라고 물어보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목사님은 우리 반 교사 선생님에게 “성경이는 금식하라고 해요.”라고 하셨다고 했다. 나는 금식하며 수련회에 참석했고, 우리 반 교사 선생님, 담당 목사님과도 상담을 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목사님은 우리 아버지가 사역을 못 하시게 되고 형도 교회를 떠나면서 ‘이러다간 성경이마저 믿음에 서지 못하고 잃을 수 있겠다’는 마음이 들어 나를 붙잡아 주시려고 금식을 시키신 것이었다.
수련회 셋째 날 저녁 모임이 끝나고, 우리 반 교사 선생님이 나에게 ‘박 목사님께 가서 상담해 달라고 말씀드려’라고 하셨다. 나는 목사님께 다가가 상담을 요청드렸다. 심각한 표정으로 아무 말씀 없이 주변을 살피시던 목사님은 무거운 목소리로 나에게 따라오라고 하셨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시는 목사님을 뒤따라 들어가 내가 문을 닫는 순간, 목사님이 내 등짝을 ‘탁’ 때리시더니 “이놈아!” 하며 환하게 웃으셨다. 자리에 앉자마자 목사님은 “너, 배고프지?” 하시면서 방에 있던 요구르트와 간식을 내주셨다.
“그래. 너, 어떤 마음이 들었는지 이야기해봐.”
그렇게 목사님과 앉아 속깊은 교제가 시작됐다. 나는 마귀에게 속아 망한 줄도 모르고 내 생각과 판단을 따라 살아가려고 했던, 말씀 앞에 비쳐진 내 모습을 이야기했다. 그때 나는 너무 두렵고 떨렸다. 이 선교회를 한 발짝이라도 떠나 내 생각을 따라 흘러간다면 하나님이 나를 쳐서 생명을 앗아가실 것만 같았다.
그러자 목사님이 내게 말씀해 주셨다.
“그래. 너, 이제부터는 내 말을 들어. 내가 인도해 줄게. 네가 믿음으로 세워지면, 너를 보고 너희 부모님도 다시 교회 앞에 나와 믿음으로 세워지고, 너희 형도 세워질 거야. 이제 네가 살아가고 싶은 삶 말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 봐. 내 말을 듣고 좇아와. 하나님이 반드시 너에게 복을 주실 거야!”
하나님의 마음으로 싸워주신 목사님이 너무도 고마웠다
그날 나는 눈물을 많이 흘렸다. 추하고 더러운 나,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는 나인데 그런 나를 위해 하나님의 마음으로 싸우고 책망해 주시는 목사님이 너무 고마웠다. 잘은 모르지만,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나니 ‘하나님이 나를 향해 가지고 계신 계획이 있겠구나. 그 계획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목사님 말씀을 듣고 살면 하나님이 나를 복되게 이끌어 주시겠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이어서 목사님이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8장 2절에 한 문둥병자가 예수님께 나아와 절하고는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라고 했어. 그러자 3절에서 예수님이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셨고, 문둥병자는 즉시로 깨끗해졌어. 이제는 네가 원하는 대로 너를 이끌어가는 게 아니라, 예수님이 원하시는 대로 네가 깨끗해지고 예수님이 원하시는 대로 네가 살아 봐.”
내 의지로 잘살아 보려고 했던 것이 잘못된 길임을, 목사님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발견할 수 있었다. 성경 안에는 더럽고 추한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뜻이 있었고, 하나님은 내가 하나님의 그 뜻을 믿고 나를 당신께 던지길 바라셨다.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시편 139:17)
그날 박 목사님과 나눈 교제를 계기로 나는 내 삶을 목사님 손에 맡기기로 했다. 2001년 12월 겨울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목사님이 인도해 주시는 대로 살았다. 2002년 3월, 서울에 있는 대학 진학을 앞두고 목사님께 나갔다. 학교가 어디인지 물어보신 목사님은 잠시 생각하시더니, 곧장 당시 서울제일교회에 시무하고 계시던 김재홍 목사님께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씀하셨다.
“김성경 형제가 이번에 대학에 들어갑니다. 어느 교회에서 지내면서 학교를 다니면 좋을까 생각하다가 서울제일교회가 좋겠다 싶어서 이렇게 전화했습니다. 다른 것 아무것도 필요없고, 김 형제가 머리 두고 잘 곳만 있으면 됩니다.”
박 목사님은 김 목사님께 진심을 담아 정중히 부탁하셨다. 그 모습을 보며 ‘내가 뭔데 목사님께서 이렇게 내 거취를 챙기고 인도해 주시지?’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목사님의 인도로 서울제일교회로 가서 신앙생활을 하며 대학을 다녔다.
생각도 못했던 ‘토고’ 단기선교
이듬해인 2003년에 단기선교를 나갈 때에도 박 목사님이 정해주신 나라로 갔다. 우리 이모부는 필리핀에서 선교하시는 남경현 목사님이다. 마침 필리핀이 영어권이고 해서, 처음에는 ‘거기 가서 이모부를 돕고 지내면 되지 않겠나?’라는 생각에 필리핀으로 단기선교를 지원했다.
2002년 10월쯤, 단기선교 2차 훈련 기간 첫날 저녁을 먹을 때였다. 박 목사님이 오셔서 단기선교에 지원한 대학생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나가시는데, 그때 목사님과 마주쳐 인사를 드렸다. 목사님은 “성경이는 단기선교 어디 지원했어?”라고 물어보셔서 “필리핀이요.”라고 말씀드렸다. 내 대답을 듣고 지나가시던 목사님이 몇 걸음 가시다 말고 갑자기 “잠깐만!” 하고 뒤를 돌아보시며 말씀하셨다. “필리핀이면 너희 이모부 있는 데 아니야? 너 이놈, 이모한테 가서 놀다 오려고 하는 거지!” 하면서 나무라셨다.
그 후, 마지막 3차 훈련 기간이었다. 단기선교 파견국 발표 전에 지원자 전체 모임이 있었다. 나는 단기선교 파견에 떨어졌다고 생각하고 모임에 갈 생각이 없었는데, 갑자기 어느 목사님이 나에게 모임에 참석하라고 하셨다. 박 목사님이 들어오셔서 지원자 한 사람 한 사람과 인터뷰를 하셨다. 나는 맨 끝에 앉아 있었는데, 목사님이 나를 보고는 “너, 단기선교 프로그램 통해서 슬쩍 이모 집에 다녀오려고 했지?” 하시더니, “얘는 어디든지 모르는 데 던져놓으면, 그 나라가 어디든지 거기서 복음 전하면 돼.”라고 하셨다. 그 말씀에 모든 교사 선생님과 학생들이 모여 있던 방이 완전히 웃음바다가 됐다. 한편 부끄럽기도 했지만, 나를 인도해주려고 하시는 목사님의 마음에 감사했다.
그 무렵, 선교회에서는 서부 아프리카 토고에 단기선교사를 보낼지 여부를 놓고 논의가 이뤄지고 있었다. 그때까지 토고는 한국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나라이고 생활 환경도 많이 열악해서 다음에 보내기로 했다가, 박 목사님이 ‘그렇지 않다. 이번에 단기선교사를 보내야 내년에 더 많은 학생들을 보낼 수 있다’고 하셔서 단기선교사를 보내기로 결정되었다. 사역자님들이 ‘그럼 토고 단기선교사로 누굴 보낼까?’를 의논하시던 중, 박 목사님이 ‘김성경을 보내자’고 하셔서 나는 생각지도 못했던 토고라는 나라에 단기선교를 다녀왔다.
단기선교사 생활을 하며, 나는 내가 알고 있던 세계와 전혀 다른 세계를 만났다. 토고에서 지내는 동안 말라리아나 장티푸스에도 몇 번이나 걸려서 고생도 했지만, 복음을 위해 그곳에서 헌신하시는 선교사님과 사모님의 삶을 보았다. 그리고 복음의 소중함과 영혼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는 기회가 됐다.
20년 전 그 말씀을 잊을 수 없다
단기선교를 마치고 2004년에 한국으로 돌아와서, 내 진로를 어떻게 정해야 할지 몰라 교회에서 목사님들과 상담했다. 그 기간에 ‘하나님은 그 어떤 물질로 주님과 교회를 섬기는 것보다, 내 몸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더 기뻐하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2001년 겨울 이후로 교회의 사랑과 종의 은혜를 많이 입은 나는 하나님께 정말 드릴 게 없었다. 그렇지만 ‘이 몸을 하나님이 원하신다면, 내 삶 전체를 하나님께 드려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것은 내 마음이 아닌, 성령이 나를 감동시켜 주셔서 생긴 마음이었다.
그렇게 나는 교회와 종의 인도를 받아 선교학교에 입학했다. 두 달이 지난 뒤에는 다시 목사님의 인도로 일찍 군에 입대했다. 그리고 2006년에 제대하여 선교학교로 돌아와, 2007년에 교회의 인도로 결혼해 아프리카 케냐 선교사로 파송받았다. 이후 2009년에 말라위로 사역지를 옮겨 지금까지 말라위에서 선교하고 있다. 이곳에서도 내내 교회와 종의 인도를 따라 지내고 있다. 그렇게 살아오면서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어렵고 힘든 시간도 있었지만 내 인생이 참 복되고 행복했다’는 사실이다.
오늘도 나는 교회와 종의 인도 아래 살아가고 있다. 2004년 2월에 선교학교에 입학한 뒤 첫날 첫 수업 때였다. 박 목사님은 마태복음 8장 3절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는 구절을 읽고 말씀을 전해주셨다.
“여러분, 지금까지 여러분은 여러분이 원하는 삶을 살았을 겁니다. 여러분 생각이 옳고 여러분의 계획이 좋아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 여러분에게는 예수님이 원하시는 길이 있고 뜻이 있습니다. 그 예수님의 뜻을 따른다면 여러분은 복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지금도 나는 내 삶과 신앙생활에 길잡이가 되어준 이 말씀을 잊을 수가 없다.
2025년에는 말라위에서 복음을 전하는 김성경 선교사의 간증을 연재합니다. 김 선교사는 2007년 케냐로 파송받았다가 2009년 말라위로 사역지가 옮겨진 후로 지금까지 아프리카에서 19년째 선교하고 있습니다. 현재 말라위에는 8개의 교회가 있고 김성경 선교사와 김은총 선교사, 문진성 선교사, 그리고 11명의 현지 사역자가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말라위 교회를 위해 많은 관심과 기도를 부탁드립니다.